▲ 백남희 철도공사 용산고속열차 승무원

요즘 열차가 어수선합니다. 빠르게 스쳐 가는 창밖을 바라보기도 하고, 멍하니 창공만 응시하기도 합니다. 황금빛으로 번져 가던 들녘은 어느덧 추수를 다 마치고 군데군데 짚 더미가 세워졌습니다. 울긋불긋 물든 기찻길 옆 단풍이 한없이 아름다웠는데, 하루아침에 스산해졌습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으로 요상합니다.

강제전출 ‘악령’이 되살아났습니다. 한국철도공사는 조합원 총투표가 가결된 직후 느닷없이 강제전출 카드를 꺼냈습니다. 사냥에 나선 하이에나가 발톱을 감추며 한가로이 풀 뜯는 사슴 목덜미를 노리듯 철도공사는 긴장 풀린 철도노동자의 이완기를 노렸습니다. 어김없는 기습이었고, 예상치 못한 역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칠흑 같은 어둠과 단잠에 빠져든 새벽녘, 철도노동자의 숨통을 겨냥했습니다.

철도노동자에게 강제전출은 깊은 상흔으로 남아 있습니다. 수년이 흘렀건만 그 상처는 아물지 않았습니다. 누군 꼭 다시 만나자며 오색실 매듭을 손목에 묶었고, 누군가는 노란 종이비행기를 날렸습니다. 망부석이 되더라도 기다리겠다며 두 손을 꼭 잡기도 했습니다. ‘또르르’ 곧 굴러 내릴 것만 같은 커다란 눈물방울도 맺혔습니다. 차마 보여서는 안 된다고 약속이나 한 듯 동지는 고개를 돌렸습니다.

“잘 가~ 미안해.”

“괜찮아, 걱정마.”

들릴 듯 말듯 코맹맹이 소리만이 허공을 맴돌았습니다. 떠나는 노동자는 아쉬운 마음이, 남겨진 노동자는 잡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엄습해 왔습니다. 한동안 마음만 먹먹했습니다. 투쟁도 이어졌습니다. 아니 그건 분노였고 절규였습니다. 기관사 수백 명은 삭발했고, 노조 차량지부 두 동지는 철탑에 올랐고, 단식에 투쟁복 착용에 천막농성이 뒤를 이었습니다.

차마 되돌아보기도 부끄러운 2009년·2014년·2016년 강제전출의 민낯이었습니다. 이렇듯 철도노동자는 이명박·박근혜 정권 9년을 강제전출에 맞서 왔습니다. 노동전문가들이 진단했듯이 강제전출은 민영화에 저항해 온 철도노동자의 조직, 철도노조를 분열시켜 약화하려는 저들의 또 다른 음모였습니다. 때론 막아 내고, 때로는 힘에 부쳐 주저앉았지만 저항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2018년. 좀 나아지나 했습니다. 아니 믿었습니다. 촛불로 하나 된 공간이 있었고, 소통과 대화·타협의 소중함을 일깨운 희망도 봤습니다. 대통령도 사장도 바뀌었으니 조금은 다를 줄 알았습니다. 오판이었나요? 어린아이처럼 순진했나요? 그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번 열차 승무원들에게 몰아친 강제전출의 악령은 과거와 시기·방법이 너무나 흡사해 놀랍기만 합니다. 철도노동자가 쟁의행위를 멈춰 선 시점에, 불통으로 일관하다 기습하고, 당사자를 배제하며 강압합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과 판으로 찍어 낸 듯 똑같았습니다. 젊음을 바치고 노년에 접어든 고참 직원을 상대로 차마 이럴 수는 없습니다. 가족이라 하지 않았던가요? 너무나 비인간적입니다.

이건 문재인 대통령의 보편적 상식에 역행하는 ‘갑질’입니다. 노사가 한창 머리를 맞대고 철도 미래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나온 ‘폭거’입니다. 공사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었습니다.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마저 저버렸습니다.

“하려면 하라고 해. 이제는 지긋지긋해. 매년 이게 뭐야. 연례행사도 아니고.”

“4조2교대 하면 누가 열차 승무원으로 오려고 하겠어. 여기도 가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노년에 총알 맞게 생겼네. 공사에 충성할 필요 없어!”

체념·원망·분노까지 다양한 반응이 쏟아졌습니다. 강제전출이라는 직격탄을 맞게 될 직원의 속내는 더욱 복잡했습니다. ‘배신당했다’ ‘버림받았다’는 말이 서슴없이 오가기도 합니다.

믿었거나 믿으려 했던 사람에게 당하는 고통은 더욱 큰 법입니다. 아니 다시 9년의 암흑기로 되돌아가야 하기에 더 큰 고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남겨진 건 투쟁밖에 없겠지요. 누군가 말했듯이 승패가 중요한 건 아닙니다. 승패는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부산물일 뿐입니다. 중요한 건 부당함에 굴하지 않고 고래 심줄같이 질기게 저항하는 것입니다. 싸워야 할 때 주저하지 않고, 나아가는 용기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들풀이 되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철도노동자는 노동조합이 강제로 해산당하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일제강점기와 철도 민영화의 파고를 넘어, 73년이 지난 오늘까지 철도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누군 무모하다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때론 무모함도 필요한 법입니다. 역사는 더딜지언정 절대 후퇴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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