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는다고 현실의 어려움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마음이 불편하다고 외면한 결과는 또 다른 불편함이다. 어떨 땐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누군가 표현처럼 노동자 마디 굵은 손가락을 만져 보자. 노동현장의 차별과 고통을 직시하자.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2018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당선작을 보내왔다. 대상 1편과 우수상 4편을 소개한다.<편집자>

그날, 언니들이 왜 다시물을 미리 끓여 놨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가 않는다. 어떤 메뉴를 준비하기 위해 미리 다시물을 끓여 놓는 일은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청소를 뒷마무리하며 전판 옆으로 갔을 때 들통에 다시물이 담겨져 전판 위에 올려져 있었다. 불안해 보여서 주변 청소도 끝난 상황이었기에 들통을 엘카 위로 내려놓을 생각으로 뚜껑을 열어 봤다. 다시물이 가득 들어 있고 아직 김이 나는 상태였지만 뜨겁지는 않았다. 혼자 들 수 없을 것 같아 주변을 둘러봤지만 다들 바쁘게 마무리 청소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고민하다가 ‘이 정도 무게쯤이야’ 하며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내리려던 순간이었다. ‘아….’ 작업복 위로 더운 물이 주르륵 타고 가슴으로 흘러들었다. 순간 깜짝 놀랐지만 손을 놓을 수도, 다시 올려놓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간신히 엘카에 내려놓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젖은 작업복 단추를 몇 개 풀고 보니 가슴 위로 주먹만 한 넓이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분명 들통 겉은 미지근한 상태였는데…. 수도꼭지에 달려 있는 호스를 이용해 상체를 숙이고 재빠르게 물을 틀어 열기를 식히며, 하필이면 가슴을 데였을까 울컥했다. 퇴근시간이 몇 분 안 남아서 먼저 나간다고 양해를 구하고 교문을 나서며 병원으로 가야 할지 고민했지만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약국으로 향했다.

화상연고와 붕대 등을 사서 집으로 가려니 서러운 마음에 그대로 집으로 갈 수 없어서 함께 일하는 숙자언니와 영신에게 오늘 술 한잔 하자고 전화를 했다. 음식점 화장실에서 벌겋게 물집이 생기려고 부푼 자리에 연고를 바르니 따끔거리며 아팠다. 술을 따르며 한숨들이 쏟아져 나왔다. 자신들도 정신없이 일하다가 얻은 상처를 기억하며 푸념이 시작됐다. 영신은 청소 끝나면 빨리빨리 집에 갈 생각들은 안 하고 닦은 데 또 닦고, 왔다 갔다 하는지 답답하다며 들통을 기울어진 곳에 불안하게 올려놓은 동료를 탓했다. 숙자언니는 바로 치약이라도 바르지 그랬냐며 자신은 전날 튀김하다 기름이 눈꺼풀 위로 튀어서 아직도 쓰라리다며 얼굴을 찡그렸다.

가슴에 덴 상처는 그 후로 두 달 넘게 화상연고를 바른 후 붕대를 접어 붙이고 일을 해야 했다. 습도가 높고 고열인 주방에서 일을 마치고 샤워라도 안 하는 것이 좋을 텐데 매일 안 할 수는 없었다. 우리 일이란 게 온몸이 땀으로 젖고 음식 냄새와 섞여 쉰 냄새가 역하게 올라왔기 때문이다. 벌써 6년이 지난 일인데도 서러웠던 그 울컥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다행히 흉터는 남지 않았지만 말이다. 화상 입고 며칠이 지난 후 영양교사에게 데였다는 말을 했다. 내 말을 듣고 얼굴이 어두워지며 “그래요?” 하는 말이 내가 들은 전부였다.

장맛비가 오는 6월쯤이면 급식실은 한증막과 같다. 오래전에 학교 공사를 하며 지상에 있던 천장이 낮고 낡은 급식실을 넓은 지하로 옮겼다는데 처음에는 몰랐지만 해가 갈수록 환기가 잘되지 않는 문제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창문을 열면 벽이 보이고 지상으로 연결돼 있었지만 외부의 바람이 잘 들어오지 못하니 장마철에는 특히 후덥지근하고 온몸이 땀으로 젖어 소금에 절여진 배추와 같았다. 하루에 두세 번 작업복을 갈아입어도 입을 때뿐이다.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서는 접촉성 피부염이 자주 생겨 움직일 때마다 쓸리고 따가웠다. 한여름에 전판 앞에서 계란말이나 부침을 할 때면 튀김을 할 때보다 더 힘들었다. 어느 날 전판 앞에서 부침을 하던 동료가 나를 부르며 손짓을 했다. 속이 매슥거리고 어지러워 일을 못하겠다고 했다. 찬물을 떠와 마시게 하고 교대해 조리를 이어 갔다.

그 일이 있고 몇 주 후 내가 반찬 담당으로 계란말이를 하던 중에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됐다.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고 시야가 흐려졌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집중하려고 했지만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순간 핑 도는 어지럼을 느끼며 벽을 잡고 복도로 더듬어 나갔다. 똑같은 지하 복도지만 전판 앞을 벗어나니 숨이 쉬어졌다. 다시 돌아와 조리를 했지만 속이 울렁거려 괴로웠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둘러보니 다들 정신이 없었다. 점심시간에 휴게실에 모였을 때 언니들에게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누구 하나 쓰러져 나가겠다는 말을 했지만 모두들 어찌해야 할지 난감해할 뿐이었다. 오래된 언니들은 늘 참고 일하는 것이 당연하게 몸에 배어 있었다.

이날 이후 급식실 후드는 제대로 돌아가는지, 창문이나 환기시설을 더 갖출 수는 없는지, 왜 에어컨이 필요한 곳에 설치돼 있지 않고, 그나마 있는 곳이 작업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출입구에 설치돼 있는지 해결해 보자고 계속 말을 했다. 처음으로 노동조합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지 전화를 했다. 노조가 생긴 지 몇 년 안 됐을 때라 그런지 전화를 받는 사람도 난감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노조에서도 알아보겠지만 나에게 교육지원청에 전화해서 문의해 보라는 말이 돌아왔다. 전화번호를 받았지만 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런 일로 일개 조리원이 전화를 해도 잘 받아 줄지가 의문이고, 떨려서 번호를 눌렀다가 끊어 버리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한 달을 망설이다가 노조간부가 왜 전화를 안 해 보냐고 자꾸 다그치는 바람에 어느 날 얼떨결에 통화를 하게 됐다.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더듬거리며 아주 천천히 급식실 상황을 설명하니 학교에 전화해서 알아보겠고 이제 곧 위생점검도 나가야 하니 그날 가서 자세히 살펴보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순간 놀라서 왜 학교에다 전화를 하냐고 바보같이 되물었다. 문제를 해결하자면 당연한 순서였는데 전화를 한 나의 정체가 드러날까 봐 두려웠다. 일을 크게 키운 거 같아 당황스러웠다. 위생점검 오면 가뜩이나 긴장되고 조심해야 하는 날인데 내가 전화를 해서 점검이 더 까다로워지면 어쩌나 새로운 걱정을 하게 됐다. 언니들에게 이 말을 전하니 불이익이 있을까 봐 걱정을 쏟아 냈다. 하지만 그렇게 또 한 달이 지나고 아무 대책도 없이 시간이 흘러가자 슬슬 오기가 생겼다. 다시 교육지원청에 전화를 걸었다. 두 번째 하니 처음보다 떨리지는 않았지만 또다시 기다리라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몇 주가 흐르고 정말 위생점검이 나왔다. 담당자가 일을 하고 있던 내게 다가와 구체적으로 어떤 작업을 할 때 힘든지 물으며 어디에 에어컨을 설치하면 좋겠는지 물어왔다. 창문도 없이 전판과 오븐, 튀김 솥이 한곳에 몰려 있는 급식실 구석으로 가서 이곳에 에어컨이 설치되면 좋겠고 창문을 설치하고 환풍기를 달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환풍기 설치를 의논하다가 숙자언니가 지하가 깊어 소형 환풍기는 필요 없고 대형 환풍기를 설치하고 벽을 뚫어 창문을 더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사이다 같은 말이어서 정말 시원했다. 평소 좋아하던 언니였는데 더 멋져 보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맛을 내기 위한 전 처리와 조리 과정을 가장 엄격하게 지키는 선배였고 청소도 가장 깔끔하고 뒷손 안 가게 마무리하는 일 잘하는 언니가 이렇게 말을 하니 일을 키운 나를 도와주는 것 같아 고마웠다. 담당자는 학교와 의논해서 필요한 곳에 에어컨을 설치하고 환풍기 문제도 계속 검토해 보자고 하며 돌아갔다. 다음 날 영양교사가 나에게 지원청에 도움 요청하기를 잘했다는 말을 해서 기분이 좋았다. 나에게 빨리 전화하지 않는다고 닦달하던 노조간부도 사실은 노조에서 교육청에 전화를 해 봤지만 당사자가 절실하게 전화하는 것이 더 빨리 해결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었고, 이참에 나를 지켜보며 노조간부로 키우려는 속내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그런데 당장 문제가 해결될 듯싶었지만 아니었다. 시간이 계속 흐르며 언니들 입에서 쓸데없는 짓을 해서 소란스럽기만 했다는 핀잔을 다시 듣게 됐다. 지원청에 계속 전화를 하고 언니들과 입을 맞추고 행정실로 올라가 항의도 해 봤다. 처음에는 안타까워하며 잘 들어줬지만 반복되니 노조에 도움을 요청하겠다는 우리들 말에 “노조, 노조 하지 말라”며 언성을 높이고 불쾌해했다. 그리고 기다리라는 말만 계속 되돌아왔다. 그러던 중 신입으로 들어온 언니가 똑같은 사례로 쓰러지는 일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내가 부축해서 보건실로 갔는데 더위를 먹은 거 같다며 병원으로 가 보라고 했다. 하지만 언니는 고집을 피우며 조퇴하지도 않고 병원으로 가지도 않았다. 한 시간 정도 휴게실에서 쉬고 나와 다시 일을 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신입이라서 되레 우리에게 많이 미안했다고 했다.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나도 급식 일에 지쳐 갔다. 일도 힘들었지만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반장언니 눈 밖에 나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게 됐다. 이유는 자신의 말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입사한 이후 처음부터 순번제로 돌아가는 구조에서 나와 짝꿍이던 숙자언니에게 열심히 일을 배웠으니 그 선배가 가르친 대로 하는 것이 왜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사사건건 작은 트집을 잡아 지적하거나 바꿀 것을 무리하게 요구했다. 다른 언니들은 무조건 참으라는 말만 했다. 나는 몸 사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아 퇴사 고민까지 하게 됐다. 다행히 이 문제는 내가 노동조합 현장간부로 일하며 조금씩 풀려 갔다. 반장언니가 노동조합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방학이 있는 달 방학식에 밥을 하지 않으니 출근하지 말고 연차를 쓰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때 반장언니는 다른 사람들은 다 출근하는데 왜 우리만 못하게 하냐며 학사일정이니 출근하겠다고 했다. 영양교사가 행정실에서 그렇게 말했다며 난처해하자 선생님이 우리 월급 주는 거 아니니 우리가 행정실에 가서 말하겠다고 했다. 그 말을 옆에서 듣던 내가 모두 모여 쉬는 시간에 반장언니가 정말 말 잘했다며 진심으로 치켜세웠다. 언니는 으쓱해하며 당연한 일이라는 듯 노조에서 교육받은 내용들을 더듬거리며 설명해 줬다. 알고 있지만 입을 열어 말을 하고 실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기에 이런 언니의 모습이 새롭게 보였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방학 중에 창문에 환풍기를 설치하려다 적당치 않아 멈추고 결국 교장선생님이 새로 부임하고 구청에서 학교에 에어컨 지원사업이 있었을 때에야 창문 없는 구석에도 큰 에어컨이 설치됐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 몇 번이고 급식실을 찾아와 살펴보고 이후에도 급식실을 지상으로 옮길 방법이 없는지 열심히 알아보던 교장선생님의 자상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제 전판 앞에서 일을 하면 숨은 쉬어졌다. 영양교사와 상의해 한여름과 초가을에는 전 요리를 줄이고 학교의 환기 문제가 심각하니 전, 오븐, 튀김요리를 하루에 다 겹치지 않게 메뉴를 조정하고 조리방법을 바꿔 도움이 되기도 했다. 작업복도 비싸지만 좋은 것으로 바꿔 입으니 겨드랑이에 늘 생겼던 접촉성 피부염도 덜 생겼다. 급식실에서는 언제 다쳤는지도 모르게 몸에 멍이 들어있을 때가 많다. 다치고 며칠이 지나서야 여기가 왜 아프지 하며 들여다보면 멍이 들어 있었다. 언니들은 그렇게 다친 것들이 모여서 골병드는 거라고 했다. 그래서 퇴근 후에는 물리치료나 침을 맞으러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우스갯소리로 “돈 벌어 다 병원에 가져다주면 뭐 먹고 사냐”라는 말이 자주 나왔다.

비정규직이라 당하는 설움은 안전사고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몇 년 전 정년이 얼마 안 남은 교장선생님이 비정규직 교직원에게 “내 사위 삼고 싶은데 비정규직이라 안 돼”라는 말을 여러 사람들 있는 데서 여러 차례 서슴없이 했다. 그 장본인과 듣는 우리들은 얼마나 민망해했는지 모른다. 정년 퇴임식 자리도 비정규직은 일반 식당에서 조촐하게 하고 정교사들과는 뷔페에서 했다. 언니들은 “우리도 고기 먹을 줄 안다. 그래도 그 자리는 가고 싶지 않다. 지난번에도 불편하게 먹어 체했는데 속만 버릴 게 뻔하다”고 하면서도 씁쓸해했다.

노동조합 전임자로 어설픈 상근이 시작된 지 한 달이 됐을 때였다. 장화에 뜨거운 물이 들어가 화상사고를 입어 병원에 입원 중인 조합원의 전화를 받게 됐다. 산재신청을 하고 싶지만 영양교사가 학교에 불이익이 있다고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억울한 마음에 노동조합에 전화를 했지만 이 조합원은 끝내 산재신청을 하지 못했다. 또 아파서 병가를 썼더니 다시 아파서 병가를 쓰게 되면 퇴사하겠다는 각서를 쓰게 한 영양교사도 있다. 울면서 전화했던 이 조합원의 목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현장을 방문하다 보면 학생들 시험기간에 다른 교직원들은 다 출근하는데 급식실만 밥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반기부터 연차 강요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급식실에서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급식을 내보내기 위해 전력질주를 하는데 이런 날 밀린 청소도 하고 교육도 받으면 안 되는 걸까? 급식 노동자들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기를 쓰고 일을 해내니 그런 것일까?

이렇게 연차 사용을 노동자가 필요할 때 쓰는 것이 아니라 강요당하다 보니 상반기에 연차와 유급병가를 다 써 버린 사람도 생긴다. 유급 병가가 있어도 잘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급식실이다. 왜냐하면 내가 아파서 쉬면 다른 동료들이 두 배로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대체인력을 구하지만 학교 일이 힘들다고 기피하는 까닭에 구하기도 힘들고 대체인력은 보조역할만 할 뿐이어서 남은 사람들이 힘들어지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아파서 쉬지만 아픈 것을 참고 일하는 동료들이 눈에 보이기 때문에 쉬면서도 마음이 좋지 않다.

또 노동자들의 약한 마음을 파고들어 학생 급식 외에도 별도의 교직원 음식 조리나 김장 행사, 교직원 식사 수발과 다림질 등 업무 외 일을 시키는 경우도 있다. 잘못된 것을 알고도 당하고 모르고도 당하는 경우다. 누군가 나서서 “이건 아니지 않냐”고 말하지 않으면 고쳐지지 않는 나쁜 관행들이다.

서울은 학교가 많고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급식실에서 일하는 조리종사자의 수도 적다. 적은 숫자로 일을 하다 보니 노동강도가 더 셀 수밖에 없고 안전사고에도 자주 노출된다. 이제 현장에서는 임금인상도 좋지만 노동강도를 줄여 달라거나 갑질 문화를 해결해 달라는 요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후 해마다 빡센 투쟁으로 빠르게 임금인상을 해 왔다. 높아진 임금과 처우개선에도 현장이 크게 바뀌지 않고 안전사고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것에 대해 집중해야 할 때다. 그동안 학교는 교육서비스업으로 분류돼 산업안전보건법에서 제외됐는데, 지난해 급식실은 업무 특성상 식당업으로 분류돼 전면 적용됐다. 하지만 교육부와 교육청에서는 지키지 않았고 결국 올해 노동조합의 전국 집중투쟁으로 산업안전보건위원회 설치를 위한 협의회를 시작하게 됐고, 안전보건교육도 집체교육으로 실시하기로 했다. 교육이 사람을 바꾼다고 노동조합에서 노동안전 보건교육을 여러 차례 진행하니 현장도 바뀌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급식실 외에도 안전사고에 무방비 상태인 학교 전체에 산업안전보건법이 전면 적용되도록 다시 투쟁을 시작한다.

노동조합의 소중함을 알지만 현장간부로만 역할을 다하려 했던 내가 상근간부를 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동기는 지난해 연이어 발생한 특성화 고등학생들의 현장실습이나 취업 후 과도한 업무와 안전사고로 사망한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큰 충격에 빠져 오십이 다된 나이에 뒤늦게 나서게 된 것이다. 어린 자녀를 키우고 있는 학부모이자 선배 노동자로 몹시 부끄럽고 괴로웠다. 대를 이어 비정규직을 물려줄 수는 없다. 비정규직 완전 철폐를 위해 모두 함께 잘사는 나라를 위해 우리 어른들이 앞장서야 할 때다. 또한 노후에 대한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없는 형편이니 일터에서 골병들지 않고 안전하고 건강하게 정년까지 일하고 싶다. 그래야 정년퇴직 후에도 노후생활을 위해서 즐겁게 늙은 노동자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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