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동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부원장(변호사)

‘전태일 정신으로 시대의 어려움 이겨 내자’. 매일노동뉴스가 전태일 열사 48주기를 맞아 마석 모란공원에서 거행된 추도식을 전하면서 뽑은 기사제목이다. “추모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전태일 정신으로 우리 시대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수호 이사장의 추념사를 인용한 것이다. ‘어려움’은 뭘까 생각해 본다.

‘볕 좋은 가을날만큼이나 소중한 날들을 그저 흘려보내는 것은 아닌지.’ 많은 이들의 걱정일 게다. 지금처럼 하루하루가 이렇게 아쉬운 날들이 언제 있었던가. 촛불을 들었던 많은 노동자와 시민들이 다시 거리로 나서고 있다. 지난주 열린 민주노총 노동자대회에 무려 6만여명이 모였다고 한다. 이번주 한국노총 노동자대회에도 적지 않은 조합원들과 시민들이 함께할 것으로 예상된다. 집회 분위기도 사뭇 다르다. 집회에서는 즐거움과 응원 대신 원망과 불만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커져가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물론 기대했던 노동공약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자회사로 적만 옮겨 놓은 반쪽짜리 정규직 전환, 온전한 1만원은 고사하고 산입범위만 일방적으로 확대된 최저임금, 노동시간단축을 무색하게 하는 탄력근로시간제 확대 등을 보고 현장 노동자들은 정말로 많이 허탈해했다. ‘해고자의 조합원 인정’ ‘국제노동기구(ILO) 수준의 노동기본권 보장’ ‘비정규 노동자 차별 철폐’ 같은 근본적인 노동기본권 실현에 관한 정책은 아예 시도해 보지도 못하고 있다.

‘촛불정부인가, 이명박근혜 3기인가?’ 지난 5일 헌법 33조위원회 연속토론회 발제에서 조돈문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대표는 “현재의 노동정책 상황을 이처럼 가혹하게 평가하고 있다. 조 대표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선언 실행을 위해 관계부처가 한 선택은 관료들의 ‘화려한 귀환’이자 촛불시민을 다시 개돼지의 자리로 돌린 것”이라고 말한다. 동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비정규 노동자들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한 표현도 아깝지 않다. 1천100만 비정규 노동자들이 느끼고 있을 상실감을 생각한다면 더한 비판이라도 들어야 하지 않겠나.

상황이 유쾌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꼼꼼히 따지고 보면 아직도 시간은 많이 남았다. 10여년 넘게 곪은 상처를 벗겨 내기가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그래서 앞으로가 중요하다. 앞으로 ‘희망’을 가지려면 필요조건이 있다. 지금이라도 잘못된 정책은 신속히 바로잡아야 한다. 현장 노동자들과 시민들의 신뢰를 얻는 데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과거 실패로 귀결된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가장 큰 유혹은 노동자들을 분리하고 갈등을 조장해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과거 정부가 늘 써 왔던 방식이다. 매번 노동시장 양극화 심화를 말하면서 ‘양극화 해소를 위해서는 고임금 노동자(=노동조합)의 양보가 전제돼야 한다’는 논리를 반복한다. 정말이지 일리(1%)만 있을 뿐이다. 고임금 노동자인 조합원이 과연 얼마나 될까. 100만여 한국노총만 보더라도 조합원 대부분(70%)이 300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다.

이에 비해 고작 30만명 안쪽이 대규모 사업장 소속이다. 2천100만 전체 노동자의 1%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들이 받는 임금수준이 얼마나 될까. 이른바 고임금(연봉 1억원)을 상회하는 조합원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아마 이러한 통계는 노동조합 소속 전체 조합원을 분석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장을 계속하는 이유는 뭘까. 일반화의 오류를 노린 의도적인 왜곡이다. 자신들의 잘못된 정책을 반성하고 바로잡으려 하지 않고 외부로 원인을 돌리려는 핑계에 불과하다. 한 시절 우리나라의 경제위기는 ‘귀족노조’ 탓이라고 노래를 한 그 누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

1970년 11월13일로부터 48년이 흘렀다. 시대와 상황은 참으로 많이 변했다. 객관적으로 정말 많이 좋아졌다는 평가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당시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조차 지키지 않는 사용자와 법 위반을 감독하지 않고 눈감는 행정을 향해 싸웠다. 노동조합을 공공의 적이나 되듯 몰아붙이는 세상을 향해 저항했다. 그런 희생에도 불구하고 전태일 열사가 오늘의 노동현장을 보게 된다면 크게 실망할 것이다.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와대 앞 농성장에서도, 굴뚝 위에서도, 광화문 앞 세종로에서도 ‘근로기준법을 지켜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린다”며 이수호 이사장은 그때와 다르지 않은 오늘을 안타까워한다. 열사의 소망대로 노동법을 지키고,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이들과 대화를 시작하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나. 우리의 희망은, 내년이 아니더라도 내후년 전태일 열사 50주기에는 “열사의 소망이 이뤄졌습니다”는 추념사를 들었으면 좋겠다.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부원장(변호사) (94kimhy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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