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효원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미국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이 쓴 <The End of Work> 한글판 제목이 '노동의 종말'이다. 별 생각 없이 따라 썼지만, 출판 20여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니 '일의 종말'로 하는 게 맞겠다 싶다. 영어로 '노동의 종말'은 'The End of Labour'가 될 듯하다.

일과 노동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일은 인간도 하지만 기계도 할 수 있다. 인간과 기계가 같이 일한 지 오래됐다. 앞으로도 인간과 기계의 공동작업이 늘어날 것이고, 언젠가 대부분의 일을 로봇이 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일이 과거의 일과 다르듯, 미래의 일은 현재의 일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다.

기계가 일하는 것을 노동한다고 부를 수 있을까? 물론 그런 시대가 올 지도 모르겠지만, 현재로선 노동과 인간을 분리시켜 생각하긴 어렵다. 결국 노동은 인간이 하는 활동이고 행위다. 노동을 하기 위해 인간은 특정 공간에서 특정 시간에 자신의 힘(에너지)을 사용한다. 인간이 쓰는 힘에는 육체적 힘은 물론 정신적 힘도 포함된다. 이를 노동력(power of labour)이라 한다.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팔고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사는 대가로 임금을 지급한다. 자본가는 노동시장과 노사관계에서 노동자의 노동력에 대한 사용(지배)권을 획득한다. 자본가를 사용자라 부르는 이유다. 고용 주체인 사용자(employer)는 노동력의 사용자(user)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고용주보다 사용자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노동력을 사용한다는 느낌을 흠뻑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노동력을 쓸 때 우리는 노동한다고 말한다. 자동차를 움직이려면 엔진 연료를 사용해야 한다. 노동자를 움직이기 위해선 노동자의 몸에 깃든 노동력을 사용해야 한다. 연료를 태워 자동차가 운행하듯, 노동력을 써야 노동자가 움직인다.

여기서 고전적인 질문이 등장한다. 임금은 노동력의 대가인가 노동의 대가인가. 임금이 노동의 대가라면 착취란 존재할 수 없다. 노동한 만큼 품삯을 받았기에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공정한 교환이 이뤄진다. 하지만 임금이 노동력의 대가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노동력 사용의 결과 노동을 하게 되고, 노동을 한 결과 상품과 용역이 생산되며, 상품과 용역을 시장에 팔아 이윤을 얻는데, 임금(노동력의 대가)은 자본가가 취한 이윤에 비해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노동력을 사용해 이뤄진 노동, 즉 일의 대가만큼 임금을 받지 못했기에 부당한 거래가 이뤄진 것이다. 이를 마르크스는 착취라 불렀다. 착취가 있다고 생각하든 없다고 생각하든, 여기서 분명한 점은 인간의 노동과 일은 서로 얽혀 있지만 다른 실체를 갖기에 분리된 별개의 존재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노동력을 써야 비로소 현실의 실체로 등장하게 되는 노동은 역사 이래 그 본질이 크게 바뀐 적이 없다. 인간은 자신의 신체적 힘과 정신적 힘을 사용해 노동을 해 왔다. 하지만 노동의 결과 이뤄지는 일은 인류 역사에서 그 실체가 급격하게 변화해 왔다. 같은 양과 질의 노동력을 쓰더라도 혼자 하느냐 다른 인간과 같이 하느냐에 따라 일의 성격과 결과는 달라졌다. 나아가 인간이 맨몸으로 노동하느냐, 기계를 써서 일하느냐에 따라 일의 성격과 결과는 달라졌다.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인간이 혼자 하는 일은 줄고 집단으로 하는 일이 많아졌다. 인간만 하는 일은 줄고 기계를 써서 하는 일이 늘어났다. 노동자가 자기 노동력을 쓰는 행위인 노동의 특징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노동의 과정인 일의 특징은 크게 변해 온 것이다. 이전에 1000명이 하던 일을 이제 1명이 할 수 있게 됐다. 그 결과 999명의 일은 종말을 고했다. 물론 999명의 일이 사라졌다고 999명의 노동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 노동력을 써서 실현될 노동은 여전히 가능태로서 현실에 존재하며, 종말을 고한 일을 더 이상 하지는 않지만 창의적인 활동(독서·그림·음악·개발·연구·학습·여행·여가·봉사·선행·운동·취미 등)을 통해 노동은 지속해서 실현될 수 있다.

일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부가 축적되는 체제 덕분에 이미 수많은 자본가들과 부자들은 자기 노동을 음주·유흥·관광·도박·환락·마약·투기·사교·폭력 등 비생산적이고 부후한 활동에 투입하고 있다. 이들에게 노동과 일은 분리돼 있다. 이들에게 생산적인 일은 종말을 고했으나, 자본 축적 체제 덕분에 자기 노동력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마음대로 쓸 수 있다. 이런 연유로 불로소득자와 유한계급 등 사회경제적 기생충이 형성될 수 있었다.

인간에게 노동은 실존적인 행위이므로 종말을 고할 수 없다. 한 인간에게 노동이 종말을 고했다는 것은 신체적·정신적으로 그 인간이 죽음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일은 종말을 고할 수 있다. 이 일에서 저 일로 직업과 고용관계를 바꿈으로써 이 일을 마치고 저 일을 시작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대부분의 일을 기계가 하게 됨으로써 인간은 일에서 해방돼 자신의 노동력을 온전히 자신이나 공동체를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결론은 분명하다. 일이 종말을 고한다고 노동이 종말을 고하는 건 아니다. 기계가 일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무슨 노동을 할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대안을 준비할 때다. 그런데 아직도 '자본가 하기 좋은(착취하기 좋은)' 체제를 선호하고 '일의 종말'과 '노동의 종말'을 섞어 치면서 미래에 대한 공포와 비관을 조장하는 선동가들이 득실댄다. 불안과 허무를 퍼뜨리면서 주 68시간 착취 체제로 퇴행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기술발전과 사회진보에 대한 저주에 맞서 노동운동은 시대를 선구하는 희망과 낙관의 전도사여야 한다. 나아가 '일의 종말'을 '노동해방'으로 변혁하는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의 실천자여야 한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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