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지영 변호사(법무법인 덕수)

선대식 오마이뉴스 기자가 쓴 책 <실명의 이유>를 이제야 읽었다. 부끄럽지만 소송대리인 중 하나라는 이유로 사진도 실려 있다. 소송을 하면서 왜 이 책을 쉽게 집어 들지 못했을까. 알고 있었지만 읽으면서 더 절감했다. 내가 모르는 사람도 아닌, 나의 의뢰인, 그 한 명 한 명이 당한 어처구니없는 비극에 절망감을, 책임지는 자 하나 없는 현실에 분노를, 무엇보다 사고 이전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불가역성에 절대적인 무력감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책은 2년 전 세상에 알려진 ‘휴대전화제조 하청업체에서 발생한 메탄올중독 실명사건’을 다루고 있다.

메탄올중독 실명사건은 2016년 2월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2016년 1월16일 부천에 있는 YN테크라는 사업장에서 일하던 이현순씨가 메탄올 중독으로 응급실에 실려갔다. 불과 5일 만에 같은 사업장에 일하던 방동근씨가 이현순씨 뒤를 따랐다.

이현순씨가 쓰러진 날, 인천에 있는 BK테크라는 공장에서 전정훈씨가 쓰러졌다. 한 달 뒤인 2016년 2월17일 같은 사업장에서 이진희씨가 쓰러졌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실명’했다. 불과 한 달 사이에 4명의 젊은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두 눈을 잃었다.

그러나 이미 2015년 2월2일 부천에 있는 덕용ENG라는 사업장에서 김영신씨가, 그해 12월30일 같은 사업장에서 양호남씨가 똑같은 사고를 당했다. 소송 진행 중 2014년 3월에 안산 반월시화공단에서 중국동포 남아무개씨가 같은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현재 양호남씨와 남씨를 제외한 5명이 원고가 돼 파견사업주와 사용사업주,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 중이다. 2016년 4월 시작한 소송이 만 3년을 향해 가고 있다. 지연된 정의의 예다. 예상대로 파견사업주와 사용사업주는 서로에게 책임을 넘기고 심지어 ‘과실상계’라는 이름으로 피해자들에게도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대한민국 역시 다를 바 없다. 대한민국은 산업안전보건법상 개별 사업장 산업안전을 유지할 의무는 ‘사업주’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부천지역의 경우 관할 사업장이 5만4천개에 근로자가 33만명인데, 소속 근로감독관은 6명에 불과해 근로감독관 1명이 매일 사업장 1곳을 감독한다 해도 37.7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고 항변했다. 결국 대한민국은 산업안전에 관해 ‘책무’만 있고 법적 책임은 없으며, 현실적으로도 산업안전 감독업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소송에서라지만, 한 국가의 항변이라기에는 너무 궁색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됐다. 그에 대한 답변이 촛불투쟁이었고, 박근혜 정권에 대한 탄핵이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뀐 지금도 그 질문은 유효하다. 휴대전화를 만들다 창졸간에 눈이 먼 청년들은 하나같이 ‘파견노동자’였다.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은 지금도 건재하다. 제조업 파견은 명백히 불법임에도 공단지역에서는 대놓고 제조업 파견노동자를 구하고 있다. 근로감독관은 여전히 부족하다. 불법파견을 자행하는 것도 모자라 실명사고 같은 후진적인 산업재해가 발생해도 사업주 처벌은 벌금이나 집행유예에 그친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입법·행정·사법 현실이 파견노동자들의 '실명의 이유' 아닐까. 과연 국가는 어디에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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