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민 청년유니온 사무처장

2016년 3월에 있었던 젊은 여성 프리랜서 웹디자이너의 죽음이 뒤늦게 알려졌다. 지난달 26일 경향신문 보도를 통해서였다. 유명 외국계 증권사의 모바일거래시스템 구축 프로젝트에 하청의 용역의 파견으로 계약을 채결해 고용돼 있었다. 하나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5단계 하청 피라미드의 가장 밑바닥이었다. 6개월 동안 진행된 프로젝트 종료를 1개월 앞두고, 이 웹디자이너의 고용 문제를 쥐고 있는 용역업체 임원이 계약연장을 빌미로 술자리로 불러냈다. 그리고 만취하게 한 후 호텔에 데려갔고, 임원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성폭행을 피해 맨발로 비상계단으로 달아나다가 실족사한 것이다. 하지만 검찰은 이 임원을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하고, 근로복지공단은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업무상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허망한 죽음 앞에 무어라 말조차 떼기가 어렵다. 고용주만 세 곳인 상황에서 일을 하면서 느꼈을 생각과 갓 프리랜서로 전업한 30대 중반 여성 웹디자이너가 내키지 않는 식사자리에 가면서 했을지 모르는 생각들, 그리고 고인의 죽음이 전해지면서 유족들이 받았을 충격까지 쉽사리 미루어 짐작하기 어려운 감정이 이 사건 하나에 담겨 있다. 한국정보통신산업노조·게임개발자연대와 이철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함께 조사한 이 사건에는 한국 사회의 수많은 모순이 집약돼 있다. 비용절감과 책임회피를 위해 하청의 용역의 파견이라는 다단계 하청구조로 고용을 하고, 계약연장 문제 등을 이용해 공적 위계를 사적 권력관계로 둔갑시킨다. 자신의 우월적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서 남성 임원이 여성 직원에게 성폭행을 시도하고, 이를 피하려다가 목숨까지 잃는다. 공권력은 정황과 증거가 있음에도 이를 철저히 외면한다. 그리고 사회보장제도는 배제의 잣대부터 들이댄다.

IT산업·프리랜서·웹디자이너라는 단어가 갖는 ‘세련된 이미지’ 속에 그들의 열악한 노동인권 실태는 너무나도 쉽게 가려진다. 사무실은 첨단이 됐지만, 여전히 권력관계의 불균형은 산업화 시대에 머물러 있거나 더욱 교묘해져 있기 일쑤다. 주당 평균 노동시간이 52시간을 넘기는 것은 일상이고, 초과근로수당이 이미 정해져 있는 포괄임금제는 무제한적인 야근을 하게 한다. 여전히 구시대적인 조직문화나 관리자의 낡은 관념은 업무가 조직되는 계약의 형식이 달라지더라도 성차별적·위계적인 폭력을 가한다. 클라우드 컴퓨팅이라거나 스마트 사무실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기술 변화는 이러한 문제를 오히려 악화시키는 게 고작이다. 플랫폼 노동의 등장은 노동자를 프리랜서라는 외피만 두르게 한 후 여러 법적·제도적 안전망 밖으로 밀어낸다. 기존 고용계약 관계를 기준으로 협소하게 해석하는 사회안전망은 기업의 외주화 전략을 오히려 부추기고, 여러 형태로 일하는 청년에 대한 제도적 보호를 어렵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 가장 먼저 노출되는 이들은 노동시장 신규진입자에 해당하는 청년, 그리고 그중에서도 더욱 취약한 청년들이다.

인공지능·블록체인·자율주행차·사물인터넷…. 미래사회 변화에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다. 이러한 기술 변화가 삶의 많은 부분을 바꿔 놓고 있지만 현실의 권력관계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도리어 기술 변화가 권력의 작동과 사회적 차별을 공고히 할 가능성도 도처에서 확인된다. 흔하게는 편의점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를 24시간 원격으로 감시한다는 이야기부터, 미국 기업 아마존에서 인공지능 채용을 내부적으로 개발하다가 성차별적 작동을 고치지 못해서 폐기했다는 뉴스에 이르면 세상이 변해도 역시 변하지 않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노동의 모습도 변해 가고 있지만 앞서 사건이 보여 주듯 그러한 비극은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이다. 외피만 첨단이고 속은 구시대적인 상황은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아마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술 변화 속에서도 일상의 권력관계에 의한 폭력으로부터 맞설 수 있는, 안전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구성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청년유니온 사무처장 (youngmin@youthunio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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