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노동자에게 단체교섭은 권리인가 의무인가. 대부분의 답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권리이기도 하고 의무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한민국헌법이 주는 답은 단호하다. 노동자에게 단체교섭은 오로지 권리다. 의무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노동자가 자기 권리로 행사하는 단체교섭을 의무로 받아들여야 하는 자는 누구인가. 당연히 노동자의 노동력을 사용하고 있는 자본가, 즉 사용자다. 헌법과 법률에 의거 사용자는 노동자가 요구하는 단체교섭에 응할 의무를 지닌다. 만약 사용자가 노동자의 단체교섭 요구를 부당하게 거부할 경우 이는 부당노동행위, 즉 불법행위가 돼 처벌받는다.

여기서 물음이 생긴다. 노동자에게도 단체교섭 의무를 부여하면 어떻게 될까. 답은 '미국처럼 된다'. 우리나라와 달리 헌법에서 단체교섭권을 비롯한 노동기본권을 따로 인정하지 않는 미국에서는 단체협약에 사용자의 경영권(management rights) 조항을 넣는 것을 법률적 원칙으로 한다. 단체협약으로 사용자가 노동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회사의 정책이나 규정을 결정하고 도입할 권한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노조는 회사가 다음 사항에 대해 배타적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인정한다. 회사 시설의 관리·운영·유지, 그리고 종업원의 선택·채용·훈련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결정할 권한. 인력을 감독하고 작업 일정을 짤 권한. 합리적 행동규칙을 만들고 시행할 권한. 규율과 효율적 운영을 확실히 할 권한. 어떤 작업이 이뤄질지, 무엇을 어떻게 생산할지 결정할 권한. 인력의 질과 양을 결정할 권한. 노동력의 크기와 구성을 결정할 권한. 신규 부서 및 하위 부서의 설치 등 종업원에게 작업을 할당하고 임무를 부여할 권한. 다른 회사 혹은 다른 부서가 해야 할 작업을 마련할 권한. 어떠한 직무·운영·서비스, 혹은 부서를 변경하거나 결합하거나 없앨 권한. 사업을 매각하거나 합병하거나 중단할 권한."

이상은 미국의 한 로펌이 사용자를 위한 '모범' 단체협약안으로 제공하는 내용을 번역한 것이다. 이 로펌은 표현과 용어만 바꿔 13가지 '모범'안을 제공하고 있다. 단체협약에 있는 사용자의 경영권 인정 조항은 강한 노조를 만나면 짧아지고, 약한 노조를 만나면 길어진다. 하지만 법적 의무조항이므로 모든 단체협약에 들어가 있다.

위에서 말하는 사안들에 대해 사용자의 배타적 권한을 인정한다면, 노동자들이 단체교섭을 할 이유는 사라진다. 사실상 사용자가 노동자의 노동조건에 관련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고 인정한 항복선언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사용자의 배타적 인사경영권을 단체협약으로 인정한 노동조합을 한국에선 '어용'이라 부른다.

노동조합의 역사는 노동시간단축의 역사이자, 사용자의 인사경영권에 대한 도전의 역사다. 노동시간을 비롯한 회사의 운영과 관련해 사용자의 독점적·배타적·일방적 지배와 결정이 이뤄지던 독재적 상황을 노동자들이 단체교섭을 통해 '공동 결정'의 민주적 상태로 변혁해 온 것이다.

1946년 제정된 일본국 헌법 28조(노동자의 단결권 및 단체행동권)는 "노동자의 단결할 권리 및 단체교섭 그 밖의 단체행동을 할 권리를 보장한다"고 해 노동 3권을 보장하면서 이를 노동자의 기본적 인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노동 3권을 헌법적 권리로 격상시키는 문제에서 일본국 헌법은 대한민국헌법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1948년 제정된 대한민국헌법이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보장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

여기서 놓쳐선 안 될 문제가 있다. 일본국 헌법 28조가 "법률의 유보" 없이 노동기본권을 노동자에게 보장하는 절대적 보장 방식을 취했다면, 대한민국 제헌헌법 18조는 "근로자의 단결·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의 자유는 법률의 범위 내에서 보장된다"고 해서 국가가 하위법을 악용해 노동 3권을 사실상 부정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는 점이다. 백낙청 교수가 '이면 헌법'이라 이름 붙인 바 있는, 헌법에 "법률의 유보" 조항을 둠으로써 하위법을 통한 헌법적 가치의 부정과 유린을 허용하는 독재적 지배 방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대한민국헌법은 부분적 개헌이 아니라 새로운 제헌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결사의 자유를 명시한 일본국 헌법 21조는 일본 국민 모두에게 적용된다. 노동자는 물론 사용자에게도 보장되는 권리인 것이다. 그런데 일본국 헌법 28조의 단결권은 노동자에게만 보장된다. 이점에서 일본국 헌법 21조가 말하는 결사의 자유와 28조가 말하는 단결권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 차이는 28조의 단결권이 (사용자가 아닌) 노동자만이 누리는 권리인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의 토대로서 '결사의 자유'를 말한다는 점이다. 대한민국헌법(10호, 1987년 전부개정)에서도 마찬가지다. 21조가 말하는 '결사의 자유'는 노동자는 물론 사용자를 비롯해 모든 국민에게 적용되는 권리다. 하지만 33조가 말하는 단결권은 노동자에게만 적용되는 권리이며,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의 전제가 된다.

동일한 원리를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87호와 98호에서 확인할 수 있다. 87호 협약에서 말하는 '결사의 자유와 단결권'은 노동자와 사용자 모두에게 보장되는 권리다. 하지만 98호에서 말하는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은 노동자에게만 보장되는 순수한 노동권이다. 98호를 자세히 읽어 보면 사용자·사용자단체와 관련해서는 노동자의 단체교섭권을 훼손하고 부정하는 반노조 차별행위(부당노동행위)를 하면 안 된다는 의무만 부여하고 있다.

단체교섭은 노동자의 권리인 동시에 사용자의 의무가 된다. 그렇기에 단체교섭은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을 주장하고 관철시키는 자리인 동시에, 사용자의 권리에 대항하고 사용자의 이익을 노동자와 사회에 환원하는 기회가 된다. 단체교섭이 노동자의 의무라고 착각하면 어떻게 될까. 미국처럼 된다. ILO 협약을 14개만 비준해 29개를 비준한 대한민국보다 더 한심한 노동후진국이 되는 것이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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