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나영 기자
“아, 저기 어딘지 알 것 같아요.” “저기 가면 네 발로 올라가야 하는데.” “저런 곳 겨울에 가면 진짜 힘들어요.”

맥도날드 직영점에서 배달노동자(라이더)로 일하고 있는 박정훈(32)씨가 가파른 계단이 찍힌 사진을 들어 보이자 라이더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가파른 골목길이나 고층건물을 걸어 오른 경험 한번 없는 배달노동자가 어디 있겠는가. 한 전직 라이더는 “11층짜리 건물에 배달해야 하는데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고객과 중간 층수에서 만났다”고 회상했다.

라이더유니온 준비모임이 지난 14일 저녁 서울 종로구 '작은 책 카페 레드북스'에 모여 첫 오프라인 모임인 ‘라이더들의 썰전’을 열었다. 박정훈씨는 올해 8월부터 패스트푸드업계와 배달대행업체 라이더를 비롯한 배달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을 위한 라이더유니온 출범을 준비하고 있다.

이날 모임은 올해 8월 개설한 오픈채팅방에서 서로의 고충을 나누던 라이더들이 한자리에 모여 일하며 겪은 에피소드를 나누고 서로를 위로하자는 취지로 준비모임이 기획했다. 행사에는 라이더와 활동가 10여명이 참석했다. 박씨는 "배달이 많은 금요일 저녁이라 라이더들 참석률이 저조한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사회는 박씨가 맡았고 패널로 전직 라이더 서상도(30)씨와 이범석(41)씨가 참여했다. 서상도씨는 맥도날드 가맹점에서 1년여, 이범석씨는 배달대행업체 ‘푸드플라이’에서 1년반을 라이더로 일했다. 1부 ‘썰전’ 순서에서 사회자와 패널들은 주최측이 준비한 사진을 보고 연상되는 배달 경험을 풀어냈다. 라이더의 처우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쏟아졌다.

과속하고 신호위반하게 만드는 구조

“배달할 때마다 죽음이 코앞에 있다고 느껴요.”

박씨가 사진 한 장을 집어 든 채 말했다. 쓰러진 오토바이 사진이었다. 배달통을 놓는 오토바이 뒷자리는 노동자가 앉는 앞자리보다 높다. 이런 오토바이로 음식을 가득 싣고 도로를 달리다 보면 균형을 잃기 쉬워 아슬아슬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주문 량이 많으면 양 손목에 배달봉지를 매달고 가는데, 이 상태에서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민첩하게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 박씨는 “마주 오는 차가 살짝만 핸들을 꺾어도 죽는다는 생각을 한다”며 “때로는 ‘오토바이 안장을 밟고 점프를 하면 죽음을 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할 정도”라고 말했다.

배달대행업체 라이더는 패스트푸드업계 직접고용 라이더보다 더 쉽게 위험에 노출된다. 맥도날드 직접고용 라이더의 경우 최저임금 수준의 기본급과 배달 주문처리 한 건당 400원의 수당을 받는다. 배달대행업체 라이더는 특수고용 노동자로 배달 한 건당 3천원 정도를 받는다. 기본급이 없는 배달대행업체 라이더는 배달 건수에 따라 받는 돈이 곧 임금의 전부다. 배달시간을 줄여야 많이 배달할 수 있다. 과속과 신호위반을 부추기는 구조다.

박씨는 “요즘 패스트푸드업계 직접고용 라이더들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배달대행업체로 옮겨 가는 추세”라며 “직접고용 라이더들의 기본급이 오르면 라이더들이 배달대행업체로 옮기지 않고 조금은 더 안전하게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요즘엔 패스트푸드업계도 배달대행업체에 배달업무를 일부 맡기고 있더라”며 “4~5년 후엔 특수고용 라이더가 늘어나 많은 라이더들이 노조 필요성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라이더도 직업입니다”

행사장을 찾은 전·현직 라이더 대부분은 사고의 경험이 있었지만 산재보험을 적용받지 못했다. 직접고용 라이더의 경우 4대 보험과 오토바이보험을 적용하지만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계약직 배달노동자가 실제 산재보상을 신청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맥도날드 라이더는 계약직으로 고용된 뒤 2년이 지나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다.

서상도씨는 “겨울에 언 길에서 유턴하다 넘어져 복숭아뼈가 심하게 다쳤는데 산재보험은 신청하지 않았다”며 “친한 매니저랑 동료들한테 산재를 받으면 재계약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박정훈씨는 “발가락이 다쳐 발톱이 뽑힌 적이 있는데 산재를 적용받았다”며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산재보험 신청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이범석씨도 “배달대행업체 라이더는 4대 보험 중 산재보험만 적용받을 수 있지만 아직 의무가입이 아니어서 산재보험에 가입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라이더들이 활용할 수 있는 제도를 잘 찾아 이용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비·폭염·추위 대책을 세우라는 주문도 이어졌다. 도로에 흥건히 고인 빗물을 가르며 길 위를 달리는 오토바이 사진을 박씨가 집어들었을 때다. 서씨는 “겨울에 비에 젖은 토시를 끼고 오토바이를 타면 손이 꽁꽁 얼고 추위가 살을 파고든다”며 “신호 대기하는 동안 호호 손을 불다 가기도 하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따뜻한 햄버거에 손을 잠시 대고 있다가 손님에게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서씨는 “오토바이 핸들에 열선 같은 것을 달아 주면 낫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행사 막바지에 라이더들은 서로를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다. 참가자들은 라이더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토로하며 “라이더는 창피한 일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박씨는 “라이더 처우개선이 필요하다고 문제를 제기한 기사에 ‘학창시절에 공부 안 하는 사람들이 배달맨을 한다’거나 ‘저 나이에 저러고 있으면 한심하다’는 내용의 댓글들이 달렸다”고 전했다. 이씨도 “사람들이 라이더를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며 “라이더는 절대 부끄러운 직업이 아니니 라이더들이 자신의 일을 당당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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