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한석호

경기도 어느 중학교에 두 아이가 있다. 둘은 초등 때부터 절친이다. 서로 집에 놀러가 밥도 먹고 잠도 잔다. 양쪽 집에서 인정하고 안심하는 사이다. 아이들 인연을 계기로 엄마끼리는 일찌감치 인사를 나눴고 전화도 이따금 주고받는다. 아빠들은 아이들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인사했다. 양쪽 가족은 어울려 기념사진을 찍었다.

한 아이는 해외를 다녀온 적이 있다. 일본과 베트남이다. 가족여행이었다. 아이는 여행 때마다 엄마와 상의해 절친 선물을 샀다. 그 나라 과자와 초콜릿을 샀고 손지갑도 샀다. 아이는 조만간 해외여행을 한 번 더 가기로 돼 있다. 고등학생이 되면 공부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을 것이라며 엄마가 제안한 약속이다.

다른 한 아이는 절친에게 선물을 받을 때마다 고마웠다. 과자와 초콜릿은 집에 가져가 동생과 나눠 먹었다. 친구가 부러웠다. 자기 처지가 속상했다. 그러면서 자신도 해외여행을 하면 선물을 사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뿐이었다. 그 아이는 해외여행 갈 형편이 안 된다. 제주도를 여행한 적도 없다. 실제 그 아이 가족의 당장 소망은 제주도 가족여행이다.

절친인 두 아이의 차이는 집안 형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두 아이의 차이가 해외여행 경험만의 차이겠는가. 그런데 누구는 재벌 자식이고 누구는 노동자 자식이라 벌어진 차이가 아니다. 애석하게도 해외를 경험한 아이든 경험하지 못한 아이든, 둘 다 노동자의 자식이다.

노동분단 때문이다. 한 아이는 중심부 노동자의 자식이다. 한 아이는 주변부 노동자의 자식이다. 다들 알다시피 중심부 노동을 대표하는 것은 재벌 소속사와 공공부문 등이다. 전체 노동의 20% 안팎이다. 나머지 대다수는 밑바닥 주변부 노동이다. 중심부와 주변부의 임금격차가 5배까지 벌어졌다. 단순한 임금격차가 아니다. 그 노동에 의지해 살아가는 가족, 특히 아이들의 삶의 격차인 것이다.

안타깝게 죽은 노회찬 의원의 연설에 이런 내용이 있다. “아들딸과 같은 수많은 직장인들이 그 빌딩을 드나들지만, 그 빌딩이 새벽 5시 반에 출근하는 아주머니들에 의해서, 청소되고 정비되고 있는 줄 의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분들의 삶이 고단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겠습니까. 이분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 같은 사람을 찾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들 눈앞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소리가 들리는 곳에 과연 있었습니까.”

지금 노동운동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그들이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찾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들의 눈앞에 있는가. 그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는가. 그들의 소리가 들리는 곳에 과연 있는가.

누가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겠는가. 세상을 바꾸려면 노동운동부터 바꿔야 한다. 밑바닥 노동자와 손잡는 노동운동, 사회와 손잡는 노동운동을 만들어야 한다.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가 임금투쟁을 마쳤다. 조합원 찬반투표에 부친 잠정합의안이 예년에 비해 낮아서 부결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통과됐다. 어떤 의미일까. 이번 내용엔 '원·하청 불공정거래와 사회양극화 해소방안'이 담겼다. 적정 납품단가를 포함한 투명거래 관행 정착과 협력사 직원 임금 안정성 확보 등이다. 부품협력사 상생협력기금 500억원 지원도 있다. 500억원? 현대차 규모로 보면 많지 않은 액수다. 하지만 거기에는 액수의 많고 적음으로 따질 수 없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 예년보다 낮은 수준의 임금인상에는 500억원의 상생협력기금이 담겨 있다.

하부영 지부장의 말이다.

"노조 창립 31년차를 맞이하는 올해는 지난 30년의 임금인상 투쟁과 달리 '하후상박 연대임금'이라는 변화를 시도했고, 첫 출발이기에 미약하지만 성과는 있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향해 더 크게 나아가겠다."

기존 노동운동을 성찰하고 변화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노동운동의 새 흐름으로 확산되고 있는 사회연대전략을 현대차에서 시작했다는 의미다.

사무금융노조 KB증권지부가 사회연대기금 조성에 합의했다. KB증권 노사는 3년간 기금을 조성하며, 올해 8억원을 출연하고, 내년과 내후년 출연금 규모는 협의해 결정하기로 했다. KB증권 노사의 합의는 사무금융노조가 야심차게 추진하는 사회연대기금의 첫걸음이다. 목표는 매년 200억원씩 2020년까지 600억원이다. 양극화 해소와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한 공익사업에 사용할 기금이다.

노동운동에서 사회연대기금을 추진하려면 부딪히는 난관이 있다. “되겠어? 조합원에게 욕먹는 거 아닐까” 또는 “투쟁으로 쟁취해야지. 그건 개량주의야” 같은 반응이다. 일부 간부·활동가의 반응이다. “내 몫을 왜 내놓아야 하는데?” 일부 조합원의 반응이다.

그렇지만 노동운동, 특히 조합원들에게는 건강한 DNA가 여전히 살아 있다. 운동의 바탕이 되는 측은지심이다. 함께 손잡고 살아야 한다는 연대의식이다. 그래서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회연대전략은 한국사회에서 사라지고 있는 측은지심과 연대의식을 불러내는 유력한 방법이다. 사회를 바꾸는 과정에서 자기 몫을 내놓는 측은지심과 연대의식보다 강한 힘은 없다. 사회연대전략이 노동운동의 사회적 신뢰도를 높이고 양극화를 완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전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jshan896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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