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매일노동뉴스> 데스크를 잠시 맡았을 때 달았다는 제목이 "민주노총, 시계 제로"다. 2002년 4월8일자 기사는 이렇다.

"민주노총이 발전노조 파업과 관련한 노정합의서를 전면 폐기하기로 했으며 총연맹 임원진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전원 사퇴하기로 했다. 이로써 노정합의서 문제로 촉발된 민주노총 위기가 극심한 안개정국으로 빠져들었다. 노정합의서에 '법과 원칙을 준수' '노사화합' 등의 표현이 들어갔고, "그동안 민영화 저지투쟁을 전개해 온 민주노총이 민영화를 합의해 준 것으로 비칠 수 있는" 조항이 들어갔으며, 징계 문제도 '적정수준' '관계당국에 건의' 등으로 당초 요구안에 미치지 못해 '사실상 항복선언'이라는 것이다."

15년이 흘러 "교섭과 투쟁의 병행"을 내걸고 당선된 김명환 집행부 출범 7개월을 넘긴 지금 민주노총 상황은 또 다른 이유에서 '시계 제로'다. 민주노총은 기존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를 "새로운 노사정 대화기구"로 개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새로 출범한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는 불참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직접선거에서 확인된 조합원의 요구는 '정파'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달아 사회적 대화를 거부하는 낡은 관행을 버리고, 통 크고 과감하게 사회적 대화를 주도하라는 것이었다.

국회의 최저임금법 '개악'은 정부·여당의 한계를 보여 주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라는 '계급 전선'에서 더욱 적극적인 공세를 펼쳐야 할 필요성을 확인시켜 준 사례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세적 요구와는 반대로, 80만 민주노총 조합원을 넘어 2천만 노동계급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법·제도 개혁을 협의하고 교섭할 투쟁 전선에서 민주노총이 이탈함으로써 촛불항쟁으로 타격받았던 재벌-관료 동맹체제는 그동안의 손실을 회복하고 재공고화(reconsolidation)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

이러한 상황은 김명환 집행부가 공약한 "산별교섭 제도화"와 "지역별·산업별 교섭과 노정 협의"를 추진할 동력 상실로 이어지고 있다. 기업의 틀을 뛰어넘는 수준에서 노사관계를 형성하고 단체교섭을 진행하는데, 사실 대통령과 여당만 바라볼 필요가 없다. 사회경제적 시스템을 개혁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소야대라는 정치적 역학구도와 자본이 근본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체제를 고려할 때 더욱 그러하다.

이런 과업들은 법과 제도를 정비함으로써 성과를 만들 수 있다. 법·제도 개혁의 방향과 내용을 협의하고 교섭하는 것이, 민주노총의 적극적 역할로 출범한 경제사회노동위의 기능이다. 하지만 국회한테 뺨 맞은 분풀이를 경제사회노동위 불참이라는 소아병적(childish) 방식으로 풀어냄으로써 2천만 노동계급의 노동조건과 삶의 질을 개선할 소중한 시간이 마냥 덧없이 흘러가고 있다.

민주노총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정파들은 시간이 민주노총의 것이고, 칼자루도 민주노총이 쥐고 있다는 정세 판단을 하는 듯하다. 두말할 필요 없이 주관적 관념론이다. 법·제도 개혁 문제를 다루는 투쟁 전선에서 민주노총이 이탈한 지금 상황에서, 노동운동과 사회개혁을 둘러싼 판세는 시간이 흐를수록 노동운동에 불리하게 돌아갈 것이다. 정파들이 믿는, 툭 하면 끄집어내는 '총파업'이라는 도끼는 녹이 슬고 자루가 썩은 지 오래다. 정세와 조건을 과학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채, 총파업 전술을 고집함으로써 희생되는 것은 조합원들임을 기억하자.

한쪽에서는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저절로 노동운동에도 훈풍이 불 것이란 주장이 들려온다. 그러나 경제 현대화를 바라는 북한 집권층이 관심 있는 것은 남한의 노동이 아니라 남한의 자본이다.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민족단합 구호다. 힘·지식·돈 중에 민주노총이 북한 현대화를 위해 내놓을 수 있는 보따리는 무엇일까. 객관적 정세에 들뜨지 말고, 냉철하게 스스로를 돌아볼 때다.

고 노회찬 의원 장례식 때 김호규 금속노조 위원장은 조사를 통해 "산별노조 건설과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민주노총의 역사적 과제를 상기시켰다. 슬픈 마음으로 들으며 지금 민주노총이 정치세력화와 관련해 어떤 방침을 갖고 있는지 생각해 봤다. "민주노조운동과 진보정치의 새바람, 민주노총 총단결과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주도할 수 있는 후보"임을 자임했던 김명환 집행부는 노동조합과 진보정당에 더해 시민·사회단체를 포괄해 진보정치를 실현하고 사회대개혁을 완성한다는 정치 방침을 약속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둘러싼 정치방침 논의와 관련해 민주노총이 적극 나서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하지만 7개월이 지나도록 논의는 진전되지 않고 있다.

사회적 대화, 다시 말해 사회개혁투쟁 전선에서 민주노총이 활발한 역할을 펼치는 것은 중충적 노사관계와 단체교섭이라는 새로운 투쟁 전선을 확보하게 만듦으로써 산별노조운동을 강화시키고, 나아가 침체된 노동자 정치세력화 전선에 활기를 불어넣는 일이다. 김명환 집행부에 대한 조합원의 요구는 분명하다. 지난 시기 조합원을 실망시킨 분열·고립·무능의 민주노총을 단결·연대·실력의 민주노총으로 혁신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회개혁투쟁·산별노조운동·정치세력화라는 역사적 과제에 관한 민주노총의 노선과 방침이 시급하게 마련되고 결의돼야 한다. 9월 중순으로 예정된 민주노총 정책대의원대회는 '시계 제로'라는 불확실성을 걷어 내고 분명한 침로를 선도하는 등대가 돼야 한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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