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호 한국노총 교육선전본부 실장

15년 전, 나는 양복을 입어야 하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출근하기 위해 양복 윗도리를 입는데 옷이 작았다. 다른 사람 옷과 바뀐 것이다. 전날 밤 술집에서 옆 테이블 누군가가 내 옷을 입고 갔고, 술기운에 옷이 바뀐 줄도 모르고 집으로 온 듯했다. 혹시 명함이 있을까 해서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더니 이상한 물건이 잡혔다. 꺼내 보니 분첩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양복과 분첩은 안 어울리는 조합이다. 퇴근길에 술집에 들러서 사장에게 옷이 바뀌었다고 말하자, “안 그래도 옷 주인에게 전화가 왔었다”고 한다. “그런데, 뭐하는 사람인지 옷에 분첩이 있어요”라고 사장에게 슬쩍 물었다. “아, 방송국 기자예요.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려면 화장하잖아요.”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게 된 것은 야당 원내대표의 ‘성 정체성’과 ‘화장’ 발언 때문이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국군기무사령부의 계엄령 검토 문건과 민간인 사찰을 폭로한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을 향해 “성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을 겪고 있는 자”라며 “화장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김 원내대표 발언은 기무사 계엄 문건의 본질을 흐리는 문제 여부를 떠나더라도 법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은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종교·장애·나이·사회적 신분·성적지향 등을 이유로 차별을 해서는 안 되며 이는 평등권을 침해한 차별행위라고 밝히고 있다. 게다가 임태훈 소장은 이미 오래전 커밍아웃을 한 바 있다. 김 원내대표는 결국 ‘성 정체성 혼란’과 ‘동성애자’를 구분 못하는 무지를 드러낸 셈이다.

이 상황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과거 일을 떠올리면서 나는 또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됐다. 오래전 일이었지만 당시 나는 바뀐 옷의 주인이 분첩을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에 의아해했고 마치 큰 비밀을 발견한 것인 양 술집 사장에게 나지막하고 은밀하게 “이 사람 화장해요”라고 말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나는 스스로 ‘진보’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인터넷에서 흔하게 접하는 성향 테스트의 단골 문항인 “동성애에 대한 차별에 반대하느냐”는 질문에는 숨도 쉬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을 한다. 설문 결과는 항상 ‘진보’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막상 그런 상황이 내 옆에서 일어났을 때 나는 나지막하고 은밀하게 “그런데 말이에요” 하고 말했던 것이다. 얼마 전 술자리에서 한 후배는 “친구 중에 동성애자가 있었는데 가엽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자연의 이치를 거슬러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까 해서”라고 한다. 그 후배 역시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며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설문용 진보’인 셈이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주인공 빌리에게는 누나 옷을 입고 화장하는 걸 즐기는 친구 마이클이 있다. 어느 날 마이클은 빌리의 볼에 뽀뽀를 하고는 좋아하는 마음과 자신이 게이임을 고백한다. 빌리는 “내가 발레를 좋아한다고 해서 게이가 아닌 건 알지”라며 돌려서 거절한다. 영화의 마지막, 왕립발레학교로 가게 된 빌리는 떠나기 전 마이클에게 같은 방법으로 뽀뽀를 해 준다. 우리는 빌리를 진보적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지 빌리는 친구로서, 마이클의 성적 지향을 몸으로 받아 주고 이해해 준 것이다.

동성애와 관련한 한 칼럼 내용을 빌리자면 “동성애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보다 ‘동성연애’에 대한 시각적 반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몸의 반응, 그것이 진심이다”.

머리에서 나온 설문용 대답이 아닌 몸과 마음이 직접 대답할 수 있는 진심을 갖기 위한 이해와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노총 교육선전본부 실장 (labor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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