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북한은 노동조합이란 말을 쓰지 않고 직업동맹이라 한다. 영어로 노동조합은 trade union인데, 직역하면 직업동맹에 가깝다. trade란 말에 직업이란 뜻이 있어서다. 북한은 1945년 해방 직후부터 직업동맹이란 말을 썼다.

45년 11월30일 결성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북조선총국은 이듬해 3월 북조선로동총동맹으로, 두 달 뒤인 5월 북조선직업동맹으로 이름을 바꿨다. 위원장엔 1930년대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 함흥공장 등에서 적색노동조합운동을 펼친 공산주의자 최경덕이 선출됐다. 처음 사무직들은 노동조합에 들어오지 않고 별도로 직업동맹을 꾸렸다. 45년 11월과 12월 문화인직업동맹과 북조선인민교원직업동맹결성준비위가 조직됐고, 1946년 2월 평양시인민교원직업동맹이 결성됐다. 46년 5월 출범한 북조선직업동맹은 생산직 중심 노동조합과 사무직 중심 직업동맹이 합쳐진 것이다. 1947년 9월 당시 17개 산별 산하 3천507개 초급단체에 38만5천명의 맹원을 뒀다.

북조선직업동맹이 조선직업총동맹으로 개편된 때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51년 1월이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한숨 돌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는 50년 12월21~23일 자강도 강계시에서 3차 전원회의를 소집해 '남북 근로단체들의 통합에 대하여'라는 결정서를 채택했다. 이에 따라 이듬해 1월20~22일 회의에서 북한의 북조선직업동맹과 남한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를 통합해 조선직업총동맹을 출범시켰다. 1930년대 함경도에서 적색농민조합운동과 적색노동조합운동을 주도한 현훈이 위원장에 선출됐다.

정권 초기부터 직업동맹의 성격 문제는 치열한 논쟁거리였다. 북조선인민위원회 노동국장 오기섭은 <인민> 47년 1월호에서 "직업동맹은 과거나 현재를 불구하고 로동계급의 리익을 위해 투쟁하는 로동자의 집합체"라고 규정했으나, 정권 주류의 생각은 달랐다. 김일성은 49년 11월 직업동맹열성자대회에서 "직업동맹 단체들이 인민경제의 발전을 위해 군중동원사업을 강화하고, 군중들에게 국가의 재산과 물자를 절약하는 교육을 실시하며, 노동 규율을 강화하고, 공장 기업소에 생산협의회를 조직해 증산 경쟁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노동자 권익단체로서의 위상은 더욱 쪼그라들었다. 군사위원회 결정 6호 '전시로동에 관하여'가 선포되면서 각 공장에서 전시증산운동이 전개돼 8시간 노동을 12시간 노동으로 연장하고, 3교대제를 2교대제로 개편하고, '시간외노동 및 공휴일 노동 운동'이 펼쳐지고, '전선돌격대운동' '전선작업반운동' '청년작업반운동' '2인분·3인분 초과생산운동' 등 갖가지 명칭의 증산경쟁운동이 전개됐다.

전쟁 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55년 말 조선직업총동맹 위원장을 맡은 서휘는 56년 6월 <노동신문>에 “필요 이상의 로동 강도의 증강은 반드시 삼가야 할 것이며, 이러저러한 구실하에 종종 실행하고 있는 부정당한 시간의 로동과 로력 랑비를 반드시 조절하도록 직맹단체들은 강력히 투쟁하라"며, 이를 위해 법적 보장하에 의무적으로 책임지게 하는 단체계약(교섭)을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두 달 후 8월 종파사건이 터져 연안파의 핵심인 서휘가 숙청됨으로써 노동자 권익단체로서의 역할을 강화하려던 흐름은 거세됐다.

55년 12월 '미제간첩' 박헌영 재판으로 남로당파가 제거되고, 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소련파와 연안파가 몰락하면서 '수령의 유일적 영도체계'가 확립됐다. 권력 변동은 직업동맹의 위상과 역할에 지대한 영항을 미쳤다.

64년 6월26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4기9차 전원회의는 직업동맹이 노동에 대한 관리감독 기능을 가질 필요가 없다며 단체계약 권한을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조선직업총동맹은 완전한 사상교양단체로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당정책·혁명전통·계급교양을 강화하는 역할을 떠맡았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직맹에 대한 당적 지도를 더욱 강화해야 하겠습니다. 직맹은 당에 끝없이 충실한 조직으로 돼야 합니다. (…) 지난날 직맹에 들어앉아 있던 나쁜 놈들은 직맹조직이 광범한 군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내세우면서 당의 령도를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아주 옳지 않습니다. 당의 령도를 떠난 직맹조직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고 일갈했다. 직업동맹이 "당과 로동계급을 련결시키는 인전대"로 확실하게 전락한 것이다.

80년 10월10~14일 조선노동당 6차 대회는 지도 이념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없애고 주체사상을 유일한 지도 이념으로 선언했다. 김일성은 81년 11월30일 조선직업총동맹 6차 대회에서 연설했다. "(직업동맹이)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 위업을 실현하기 위해 억세게 싸워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사상·기술·문화의 3대 혁명을 힘 있게 벌여야 한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2016년 5월6~9일 조선노동당 7차 대회가 열렸다. 김정은은 폐회사에서 "모두 다 김일성-김정일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당 중앙의 두리에 단결하고 또 단결해 사회주의 위업의 완성과 조국의 자주적 통일, 세계자주화 위업의 승리를 위해 힘차게 싸워 나아갑시다"고 역설했다. 다섯 달 뒤인 10월25~26일 조선직업총동맹 7차 대회가 열렸다. 참가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김정은은 "직업동맹의 지도사상은 오늘도 래일도 영원히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입니다. 직업동맹은 조선로동당의 령도에 끝없이 충실해야 합니다"고 교시했다. 조선직업총동맹이 권익단체가 아니라 교양단체임을 거듭 못 박은 것이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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