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문재인 정부의 '우향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여럿 나온다. 여당은 최저임금법 개악으로 최저임금 인상효과를 반감시켰고, 대통령은 인도에서 국정농단 재판을 받고 있는 이재용을 만나 국내 일자리를 부탁했다. 공공기금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기 위해 경영에 개입하겠다는 국민연금 계획은 국민연금 의결권 절반을 민간 금융기관에 위임하는 것으로 시작도 전에 뒤집어졌다. 몇 차례에 걸쳐 발표된 부동산 규제정책은 말 그대로 새 발의 피 정도에 그치고 있고, 최근 재벌 저격수를 자처하던 경제정책 책임자들은 아예 전경련식 규제개혁론을 설파 중이다.

문재인 정부가 변한 것일까? 문재인 정부가 촛불의 요구를 저버린 것일까? 내 생각엔 아니다. 문재인 정부가 변한 것이 아니라 더불어민주당식 개혁의제들이 그 한계를 보여 주는 것일 뿐이다.

최저임금법 개악부터 보자. 시장에서의 임금-고용 법칙을 전제하면 생산성 증가 없이 임금을 올리면, 저생산성-저이윤 사업주들은 고용을 줄이거나 사업을 포기하게 된다. 사업주들이 앞으로의 경제여건을 낙관적으로 보지도 않기 때문에 임금부담을 상쇄할 자본투자를 감행할 리도 없다. 문재인 정부는 시장의 법칙을 바꿔 보겠다는 배포 대신 소득주도 성장이란 이름으로 모두가 불편하지 않을 지향을 내세우며 최저임금을 대폭 올렸다. 그리고 그것이 감당이 안 되자 최저임금을 줬다 뺏는 황당한 법 개정을 한 것이다. 정부와 여당은 최저임금법 개악으로 시장이 정부 위에 있다는 사실을 소심하게 고백했다.

이재용을 만나 고용을 늘려 달라고 부탁한 것도 마찬가지다. 30년 넘게 이어진 수출재벌 주도 경제에서는 국민경제 성장이 수출기업의 성장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추격성장 한계와 과잉설비 속에 중화학공업이 위기를 겪고 있어 나라 경제의 장기전망이 위태위태하다. 이런 조건에서 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부터 재벌개혁을 주주권의 회복이나 원·하청 공정거래 같은 시장 정의로 접근했다. 하지만 주주행동주의가 중화학공업에 새 성장동력을 줄 수 없고, 기술과 자본 모두 부족한 상태로 대기업 종속적으로 오랜 기간 사업한 하청 중소기업이 거래관계가 조금 변한다고 경쟁력을 갖출 리도 만무하다. 공정한 시장이 국민경제 성장이나 서민의 행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혁신성장이라 내세운 것들은 지난 정권 정책들의 재탕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한계를 공정한 시장으로 극복해 보겠다는 희망은 진지할 수는 있지만 실현 불가능한 희망일 뿐이다. 결국 현실의 한계에서 문재인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다시 재벌에게 손을 벌리는 것이다.

부동산 관련 규제도 한번 보자. 정부가 얼마 전 발표한 보유세 개편은 고액 부동산 소유자에게 연 몇십 만원 정도 세금을 더 걷는 것이다. 조선일보마저 시장반응이 “미지근하다”며 핀잔을 줄 정도다. 수도권에 자본을 집적해 성장한 우리나라는 인구감소나 경제침체에도 수도권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더 상승하기도 하는데, 나라가 어려워져도 어쨌거나 끝까지 남는 것이 수도권 경제라고 생각해서다. 우리나라 민간 소유 부동산은 2017년 말 7천조원에 달한다. 3% 임대료만 따져도 200조원이다. 임대료를 받지 않는 부동산은 당장 임대수입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미래 자산차익을 감안하면 사실상 이 정도 소득이 부동산 소유자들에게 잠정적으로 귀속된다고 봐야 한다. 수도권이 이 중 60%를 차지한다. 노무현 때도 경험했듯 웬만한 부동산 정책으로는 시장은 꿈적도 하지 않는다. 부동산의 사적소유라는 시장 법칙을 존중하면서 수도권 부동산을 잡을 방법은 없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얼마 전 언론인터뷰에서 규제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추상적으로 이야기했지만 규제개혁은 현실적으로 대부분 서비스업에 집중된다. 노무현 정부 때부터 역대 정부에서 단골 메뉴로 등장한 서비스업 규제개혁이 되겠다. 김 위원장은 규제 탓에 첨단 서비스업이 곤란을 겪고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규제개혁의 핵심은 첨단산업이 아니라 도소매·의료·사회서비스 같은 전통적 서비스 영역이다. 규제개혁은 이 부분에 대기업 진출로 영세사업자들을 구조조정하는 것인데, 정부는 앞에서는 골목상권 보호를 이야기하면서 뒤에서는 골목상권 퇴출을 주장하는 꼴이다. 나도 자영업 경제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런데 문제는 변화에 부가되는 비용을 누가 내는가다. 정부처럼 앞뒤가 다른 방식의 정책을 내세우며 규제개혁으로 변화를 도모하는 방식은 약자들이 비용을 부담하게 된다. 이런 비용부담 방식이 사실 시장의 법칙이기도 하다.

요컨대 공정한 시장을 촛불에 대한 약속으로 생각하는 문 정부의 지향으로는 구조적 한계들을 넘어설 수 없다. 이는 이전 더불어민주당 정부들의 공통된 한계이기도 했다. 문 정부는 결과적으로 남북관계나 정치개혁 수준에서 여론 지지도가 높은 사안들을 처리하는 개혁정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시장의 법칙이 작동하는 곳에서 문 정부 개혁도 멈출 것이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자운동은 문 정부를 노동존중 정책으로 견인하겠다는 미몽에서 벗어나, 스스로 대안이 될 수 있도록 내부 개혁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귀족노조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기업과 공공부문 노조들의 계급적 지향을 강화하고, 민주노총이 좁은 의미의 노동부문 이해관계자로 행동할 것이 아니라 노동하는 시민 모두를 이끌고 나갈 거시 계획의 수립 주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회적 대화기구에 대한 참여 여부도 이런 중장기 계획 속에서 판단돼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 절실한 것은 문 정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운동이 대한민국의 변화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것이니 말이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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