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환경의학전문의는 고 문송면군 수은중독 사망과 원진레이온 사태 뒤 직업병을 다룰 전문의가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필요로 탄생했다. 태생부터 노동자 곁에 있는 의사일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일터건강을 지키는 직업환경의학과의사회’라는 모임이 있다. 의사들이 진료실에서 하는 진단과 치료에 머물지 않고 노동과정과 일터 환경, 일터 건강을 지키겠다며 만든 모임이다. 문송면군 산재사망 30주년을 맞아 지금도 이어지는 노동현장 직업병 문제를 알리겠다며 의사회 회원들이 글을 보내왔다. 4회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정필균 직업환경의학전문의(일터건강을 지키는 직업환경의학과의사회)

‘근로시간 주당 52시간으로 단축’ ‘2018년 최저임금 7천530원’. 매체에서는 오랜 시간의 진통 끝에 우리의 노동환경이 크게 개선되고 있다고 보도한다. 그러나 그만큼 직업안전보건 분야가 개선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산업재해 은폐’ ‘병 주고 채찍질하는 회사’라는 헤드라인으로 그 평가를 갈음할 수 있을 듯하다. 필자는 직업환경의학과전문의로서 의료현장 일선에서 일하며 느꼈던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아마 누군가의 부모님·배우자, 또는 자식이 지금도 매일같이 겪고 있을 상황이다.

요양보호사 A씨. 요양원이 이전하면서 A씨를 비롯한 요양보호사들은 이직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때 숙련된 인력들을 한 번에 잃어버릴까 봐 걱정한 사업주가 묘한 제안을 한다. “힘드시겠지만 멀리까지 다니시면 일 그만둘 때 고용보험 탈 수 있게 해 드릴게요. 좀 부탁드립니다.” 이 말을 믿고 많은 요양보호사들은 새 직장으로 이직을 한다. 그러나 A씨가 어깨 통증으로 사직하겠다고 했을 때 사업주는 너무나 태연하게 고용보험에 관한 약속은 간데없이 사표를 쓰고 나가라고 말한다. 이후 부족한 치료비 때문에 고심하던 A씨는 어디선가 이야기를 듣고 무거운 마음으로 외래로 직업환경의학과를 방문한다.

철제 지퍼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B씨. 200킬로그램에 가까운 자재를 운반하던 중 가슴 등 여러 부위에 통증이 생겨 병원을 방문했지만 의사소통이 어렵고 증상이 애매해 수백만원의 검사비만 자비로 잔뜩 지불하게 된다. 그때 마침 동료 노동자에게 산업재해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사업주에게 이야기를 해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욕설과 폭행 그리고 협박이었다.

소화기내과 전문의 C씨. 얼마 전 같은 과 동료 의사가 사직하게 되면서 이전보다 월등히 많은 수의 환자를 진료하게 됐다. 업무량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내시경 검사를 시행하는 손목과 팔꿈치 통증이 심해졌지만 병원측이 딱히 뭔가를 해 줄 것 같지도 않고, 혹시라도 고용에 불이익이 갈까 두려웠던 C씨는 팔목보호대를 차고 소염진통제를 입 안에 털어 넣어 가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틴다.

위 세 명의 노동자는 성별도 나이도 직업도 모두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산재보상 자체를 잘 몰라서, 동료에게 피해가 갈까 봐, 평판이 나빠질까 봐, 해고를 당할까 봐, 심지어 맞을까 봐 같은 구체적인 이유는 서로 다를지라도 모두가 산재신청을 못한다는 점이다.

산업재해에서 예방만큼 중요한 분야를 꼽자면 단연 보상이 아닐까 한다. 산재로 인해 발생되는 각종 비용손실은 비단 노동자 본인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 사회까지 병들게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헌법 10조와 34조에서 국민의 건강권을 보장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지만 실업률이 낮아질 줄 모르는 작금의 세태 속에서 고용은 때로는 그 자체로 마치 사용자가 내린 ‘은혜’처럼 여겨지기에 노동자들은 여전히 자신의 마땅한 권리를 입에 담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본인의 권리를 주장하기만 해도 죄인이 되는 사회인 것이다.

어떻게 해야 이런 상황을 조금씩이라도 고쳐 나갈 수 있을까. 먼저 유관부처나 전문가 집단은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산재발생률만을 낮추는 데 치중해 결과적으로 산재가 은폐되는 결과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들이 산재보상이 지니는 의미를 보다 확실히 알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하며, 이들이 더 당당하고 거리낌 없이 산업재해를 입에 올릴 수 있는 제도와 환경을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한다. 노동자 스스로 노동의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임금은 제공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해야 한다. 산재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업무 공백 등의 제반 문제 역시 노동자가 걱정할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노동자들이여, 마땅한 우리의 권리를 찾는 것에 좀 더 당당하자. 우리 모두 더 이상 이유 없는 죄인이 되지 말자.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