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현철 직업환경의학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또 한 생명이 스러졌다. 도금사업장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시안화수소라는 유독물질에 중독돼 사망했다. 스물세 살,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됐다. 노동자들은 계속 다치고 죽어 간다. 힘든 일은 당최 안 하려고 하는 것이 요즘 젊은이라는데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끼여 숨지고, 불법파견돼 메탄올로 눈이 멀고, 소화기 약제로 간이 녹아내려 숨지고, 도금조에서 발생한 유독물질인 시안화수소에 숨이 멎은 이는 모두 앞길이 구만리였던 청년노동자들이다.

노동자들의 직업건강을 위해 복무하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당혹감과 좌절감에 펜을 들었지만 청춘의 죽음을 대해야 하는 가족과 동료들의 비통함보다 더할 수는 없기에 절절한 마음으로 애도하고 사죄하는 것이 먼저다. 우리의 책임이다.

30년 전 열다섯 살 소년 노동자 문송면의 수은중독을 제대로 진단해 내지 못한 임상의료 시스템의 문제와 수백 명의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이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병들고 죽어 가는 과정에서 제대로 힘이 돼 주지 못한 사회적 책임을 통감하며 안전보건제도들이 일부 정비되고, 지금의 직업환경의학(산업의학) 전문의 제도가 도입됐다. 필자를 이렇게 번듯하게 먹고살게 해 주는 직업은 당연히도 정당한 건강권을 요구하고 싸운 노동자들 덕으로 만들어진 사회적 일자리다. 그러기에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공공의 직무가 있는 것이다.

그의 죽음을 막을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작업 전에 보호구를 갖추는 것을 신호등을 가려 건너는 것처럼 일찍이 체득했더라면, 자신이 바가지로 퍼 담은 시안화나트륨과 반응산물이 얼마나 위험한 물질인지 누군가 귀띔이라도 해 줬더라면,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를 보여 주고 이해시켰더라면, 배치 전 건강진단을 시행해 담당의사가 사려 깊은 주의를 줬더라면 그는 오늘을 살고 내일을 계획하고 있었을 것이다.

법과 제도는 MSDS에 화학물질의 위험성, 취급상 주의와 대처방법을 기록해 게시하고 취급 작업자들에게 그 위험을 주지시키라고 규정하고 있다. 위험한 화학물질에는 경고표지를 부착해 취급 노동자들의 ‘위험인지’를 각성시키도록 하고 있다. 안전보건교육을 정기적으로 하고 필요한 경우 수시로 하도록 하고 있으며 유해물질교육을 필수적으로 배치해야 한다. 새롭게 유해위험작업에 배치된 노동자들에게는 별도 교육을 하고, 배치 전에는 건강진단을 하도록 의무화했다. 유해물질을 취급하는 노동자들에게 보호구를 착용하도록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모든 사업장은 작업장 안전보건상 위험요인을 매년 점검하고 보완하도록 하는 위험성평가를 해야 한다. 이 모든 제도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제대로 작동하고 기능했다면 한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터 안전과 건강문제에 대해 형식적 책임을 사업주에게 지우고 있지만 온갖 복잡한 화학물질 위험을 알고 대처하는 방법을 이해하도록 하는 내용적 책임과 관리 책임은 누구의 몫으로 할 것인지 따져 봐야 한다. 공공의 책임이다.

하지만 근로감독관들이 1년 동안 정기감독을 다녀도 전체 사업장의 0.1%밖에 챙기지 못한다. 산업재해를 예방하고 국민 안전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사건·사고가 발생하지 않으면 가장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일상의 안전이 유지되면 그것이 어떤 인위적 노력이 없이도 원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여겨져 웬만해서는 칭찬받지 못한다. 그러다가 사건·사고가 발생하는 순간 온갖 비난의 화살을 받아 내야 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공공제도와 조직이 필요한 까닭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함이다.

소규모 사업장과 안전보건상 취약한 노동자들의 안전과 건강을 챙기고 안타까운 죽음을 막기 위해서는 문제를 드러내야 한다. 문제를 드러내면 책임의 문제가 따른다. 그것을 감당해 낼 수 있는가 하는 부담과 걱정이 스스로를 위축시킬 수 있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은 위험과 문제가 존재하는 한 죽음을 막을 수 없다. 문제를 드러내고 책임을 다하지 못했음을 통감하고 비난의 화살을 받아 내며 앞으로의 대안을 이야기해야 한다. 잘못한 일들과 잘못될 수밖에 없었던 구조를 드러내고 비판을 감수하되 해결을 위한 자원을 요구하고 얻어 내야 한다.

소규모 사업장과 사각지대 노동자들에게는 계몽·훈계가 아니라 직접 행동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조직이 필요하다. 정부에 더 큰 책임을 자임하고 자원 배분을 요구해야 한다. 공공제도는 비판을 감수하고 문제를 드러내고 성장하고 단련돼야 한다.

법정 제도를 수행하는 역할을 업으로 삼는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특수건강진단·작업환경측정 등 기존 제도를 넘어 일상의 보건관리로 진전해야 하며 현장 속으로 시선과 발길을 옮겨야 한다. 우리도 공공제도의 일부다. 공공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성찰하고 행동해야 한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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