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진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집행위원장

사상 초유의 헌정유린 사태에 대한 분노가 뜨겁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근혜 정부의 재판거래가 드러나며, 법원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고 했으나 말잔치에 불과했던 것이다. 애초 편파판정을 마음먹은 심판이 있는 경기에서 공정한 게임은 불가능하다. 이를 모르고 경기에 나선 선수들만 놀아난다. 권력 편에서 작동하는 사법체계에서 권력 바깥에 위치한 이들, 많은 노동자들이 억울한 희생양이 됐다.

철저히 정치적 판결을 한 사건이 아니더라도, 약자의 목소리가 무시되는 재판 결과를 종종 마주한다. 최근 이런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을 받은 한 노동자가 있다. 조남덕 금속노조 콘티넨탈지회장은 2016년 7월 인근 사업장에서 발생한 화학물질 누출사고 때 ‘작업대피권’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회사로부터 3개월 정직이라는 징계 처분을 받았다. 산업안전보건법 26조에 명시된 작업중지권을 행사한 것을 이유로 징계를 받은 그는 부당징계 철회 소송을 했으나 최근 1심에서 패소했다.

사고 발생 당일 조남덕 지회장은 주변 회사 지인에게 걸려 온 다급한 전화로 자신이 일하는 세종시 부강산업단지 인근 사업장(반경 300미터)에서 화학물질 누출사고가 발생한 것을 알게 됐다. 지역주민들과 인근 사업장 노동자들이 대피하고 있으니 콘티넨탈에서도 빨리 조치를 취하라는 다급한 통보였다. 휴대전화로 뉴스 속보를 확인한 조씨는 119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확인한 후 회사 안전관리자를 찾아 공문을 전달하고 빠른 조치를 촉구했다. 하지만 관리자는 "기다리라"고만 할 뿐이었다.

자신만이 아니라 조합원들까지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는 조 지회장은 곧바로 노동부 위험상황 신고전화를 통해 발 빠른 현장대처를 위한 출동을 주문하고, 다시 회사 관리자를 찾아 예방조치와 함께 긴급히 작업자 모두에게 가스 누출사고를 알릴 것을 요구하지만 또다시 묵살당했다.

잠시 뒤 근로감독관이 현장을 방문해 회사 관리자와 동석한 면담자리에서 이미 인근 사업장에 대피명령이 떨어졌음을 알리며, 예방적 차원에서 작업대피가 필요하다고 권고한다. 그럼에도 회사 관리자는 “지금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닌데 공장을 멈추란 말이냐”고 반박하며 묵살한다.

거듭된 예방조치 요구와 근로감독관의 대피명령에도 반응하지 않는 회사 태도를 확인한 조 지회장은 조합원들과 해당 상황을 공유하고 빠르게 대피할 것을 명령한다. 또한 구토와 어지럼증을 보인 조합원들에게는 병원 치료를 권한다. 이러한 작업대피권 발동으로 조 지회장은 징계를 받고, 재판에서도 패소했다.

패소 이유는 ‘급박한 위험’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고 발생과 당장의 조치, 대처에 대해 산업단지공단·회사·소방본부 어느 누구도 알려 주지 않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명령만 기다리는 게 옳았던 것일까. 노동자들의 상황 파악은 무시돼도 좋았던 걸까.

질문이 꼬리를 잇게 된다. 과연 급박한 위험은 누가 판단하는 것인가. 인명 피해가 없으면 급박한 위험이 아닌가. 위험에서 노동자를 대피시킬 책임이 있는 회사 관리자가 노동부 근로감독관의 대피명령이나 행정지도를 따르지 않은 것은 문제가 없는가. 손쉽게 무시해도 되는, 아무 권한이 없는 근로감독관의 행정지도는 이대로 충분한가. 화학물질 누출사고는 인명피해가 없다면 전파하지 않아도 괜찮은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무수한 질문이 쌓이고, 남는다. 과연 대피명령을 한 노동자에 대한 징계가 합리적이라고 할 정도로, 회사·노동부·산업단지공단·소방본부 등 각 연계기관에서의 모든 조치가 적절하고 충분했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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