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정기훈 기자
"지금 우리는 기업과 국가경제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노동자가 병들고 죽어 간 역사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정당화하는 논리를 목도하고 있다는 참담함에 다음과 같이 요구합니다. 첫째, 삼성반도체 공장 작업환경측정보고서는 모두 공개해야 합니다. 둘째, 영업비밀에 대한 사회적 규제를 강화해야 합니다. 셋째, 산재 노동자에게 충분하고 신속한 보상을 해 줘야 합니다."

최근 의사 116명이 삼성 작업환경측정보고서 공개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노동 현안에 의사들이 집단적으로 성명을 낸 것은 드문 일이다. 성명을 주도한 단체는 일터건강을 지키는 직업환경의학과의사회(회장 강충원)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18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사무실에서 강충원(40·사진) 회장을 만났다.

"노동자 건강 지켜야" 목소리 높이는 의사들

"노동자 건강을 개선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습니다. 개인 습관을 바꾸거나 질병을 찾아내 치료하는 방식이 있고, 사업장 작업환경을 연구해 잘못된 부분을 바꾸는 방식도 있죠. 법을 바꾸고 제도를 개선하는 방식도 있어요. 모든 것이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업환경의학과의사회 역할을 묻자 강충원 회장은 "노동자 건강에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쓸모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 한마디로 인정투쟁"이라고 답했다. 그는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진료실 안에만 있으면 노동자 건강을 지킬 수 없다”고 말했다. 직업환경의학과의사회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부서도 '사회참여부'다. 지난해 LG유플러스 고객센터 현장실습생 진상규명 대책회의에 참여하고 근로시간 특례조항 폐지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직업환경의학과 의사의 딜레마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들이 스스로의 ‘쓸모’를 인정받기 위해 나선 것은 사업장 보건관리제도가 가진 딜레마 때문이다.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할 일을 열심히 할수록 그 비용을 부담하는 사업주는 불편해한다. 특수건강진단을 통해 직업병을 가진 노동자나 사업장 유해위험요인을 적극적으로 찾거나, 사업장 보건관리대행을 맡아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작업환경을 요구하는 의사는 시장경쟁에서 도태된다. 노동자 건강을 지키는 파수꾼인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오히려 사업주에게 면죄부를 주는 역할을 도맡게 되는 현실이다. 메탄올 중독과 납 중독 같은 심각한 직업병 환자가 발생하는데도 특수건강진단에서 직업병 유소견자 90%가 ‘소음성난청’ 판정에 그친다.

“특수건강진단은 노동자가 사업장에서 의사를 만나는 유일한 시간이에요. 그런데 하루에 몇 명을 검진해야 하는지 제한이 없어요. 특수건강진단을 나간 의사가 하루에 수백 명을 검진해도 됩니다. 반면 일반건강진단은 국민건강보험공단이 하루 100명 이상 출장검진을 할 수 없도록 제한하죠.”

직업환경의학과의사회는 이런 불합리한 구조를 바꾸는 데 힘을 모을 생각이다. 지난해 2월 발족 후 첫 사업이 국제산업보건학회(ICOH)가 제정한 산업보건전문가를 위한 윤리강령 한국어판 번역이었다. 강충원 회장은 “윤리적으로 일하려면 윤리적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며 “비용을 내는 사업주나 의사를 고용한 기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정당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직업환경의학과의사회가 방어막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지금처럼 사업장 보건관리를 사업주에 맡기고 박리다매 방식으로 가서는 노동자 건강을 지킬 수 없다”며 “안전보건공단 데이터베이스에 쌓여만 있는 사업장 작업환경측정·보건관리 자료를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노동자와 전문가들이 소통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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