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일노동뉴스 자료사진

시곗바늘이 오후 4시를 가리켰다. 사립대병원 간호사 A씨는 초조해졌다. '오늘도 늦었구나.'

이날 오전 6시가 되기 전 출근한 A씨는 오후 4시가 될 때까지 간호사 스테이션에 앉아 있었다. 취업규칙상 근무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3시까지다. 그런데 환자 인수인계에 평균 1시간 정도 걸린다. 1시간 일찍 출근해 1시간 늦게 퇴근하는 구조다. 인수인계 시간은 짧으면 30분, 길면 1시간30분이 넘어간다. 문제는 인수인계 시간은 임금을 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업무에 불가피한 시간인데도 병원은 초과근로수당을 준 적이 없다.

“초과근로수당 달라” 불붙는 집단소송

숨어 있는 노동시간을 둘러싼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근무시간 1분 1초를 아끼려는 기업들과 임금을 주지 않는 ‘공짜노동’을 줄이려는 노동계의 힘겨루기가 본격화하는 모양새다.

7일 보건의료노조는 병원노동자 미지급 초과근로수당 집단소송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나영명 기획실장은 “6~7월 전체 조합원을 대상으로 미지급 초과근로 실태조사를 해서 8월쯤 집단소송을 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병원노동자들의 공짜노동은 심각한 수준이다. 노조가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전국 54개 병원에서 일하는 노동자 1만1천662명을 대상으로 ‘병원 갑질과 인권유린 실태조사’를 한 결과 59.7%가 "시간외근무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올해 초에는 부산지방고용노동청이 대형병원 31곳을 근로감독한 결과 29곳에서 초과근로를 했는데도 수당을 지급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근무시간 종료 뒤 인수인계를 하도록 하거나 교육에 참석시켰다. 부산노동청이 확인한 미지급 초과근로수당만 43억8천100만원이다.

병원노동자들이 미지급 초과근로수당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출·퇴근기록 단말기 내역이나 컴퓨터 접속기록처럼 출·퇴근 시간을 증명할 근거를 확보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초과근로 입증이 쉽지 않다.

스마트폰 앱 ‘야근시계’
법원에서 증거능력 인정 못 받아


2013년 홈플러스 노동자들이 미지급 초과근로수당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홈플러스에서 초과근로를 하려면 관리자 승인을 받아야 했다. 관리자가 불쾌해하거나 난처해하는 경우가 많아 맘 편히 초과근로 신청을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출·퇴근 시간을 입증할 마땅한 장치나 제도조차 없었다. 그래서 홈플러스일반노조 간부 2명이 5개월간 자신의 초과근로시간을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야근시계’를 이용해 기록했다.

공짜노동에 시달리던 IT 노동자 양아무개(43)씨가 야근시계 앱 개발에 참여개발했는데, 사연이 있다. 양씨는 은행 IT 자회사에서 2년3개월간 무려 8천700시간을 일하다 결핵성 폐농양에 걸렸다.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승인을 신청했고, 거부당하자 소송을 냈다. 이 과정에서 야근시계 앱을 만들었다. 장시간 근로를 입증해야 산재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회사 자료에 그의 출근시간은 있었지만 퇴근시간은 없었다. IT노조와 손잡고 야근시계 앱을 만든 배경이다.

스마트폰에 야근시계 앱을 설치한 뒤 퇴근 때 화면을 몇 번 두드리면 퇴근하는 시간과 위치가 정해진 이메일로 전송된다. 그 시간까지 일했다는 게 입증되도록 일하는 모습을 촬영해 함께 보관할 수 있다.

서울중앙지법은 홈플러스 노동자의 미지급 초과근로수당 청구소송에서 “현실적으로 초과근로가 필요한데 사용자측이 싫어하기 때문에 사실상 초과근로신청을 포기하는 분위기가 있는 직장이라면 사용자 승인을 받지 않더라도 실제로 초과근로한 시간에 대해 상당한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야근시계 앱이 기록한 홈플러스 노동자들의 초과근로 기록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상급심에서 패소했다. 2심 법원은 “초과근로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판결했고, 대법원도 2015년 같은 결론을 내렸다.

강문대 변호사(법률사무소 로그)는 “야근시계 앱은 위치추적(GPS) 기능까지 탑재한 만큼 조작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도 노동자가 일하지 않고 회사에 머물거나 스마트폰을 회사에 두고 다른 장소에 있는 방식으로 속일 수 있다는 회사 주장이 받아 들여졌다”고 설명했다.

미지급 초과근로수당 요구하자
출·퇴근 기록기 없앤 대형마트


대형마트에서는 공짜노동이 일상화돼 있다. 마트 즉석조리 코너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정해진 근무시간보다 30분 먼저 출근한다. 개점 시간에 맞춰 통닭이나 김밥을 팔려면 그 전에 닭을 튀기고 김밥을 말아야 한다. 계산원은 계산대에 있는 시간만 근무시간으로 산정된다. 판매금액 정산이나 시재금(현금)·종량제 쓰레기봉투 구비 같은 업무준비 시간은 공짜노동에 속한다.

롯데마트 노동자들은 2015년 10월 미지급 초과근로수당을 달라며 서울동부고용노동지청에 진정을 넣었다. 홈플러스와 달리 롯데마트는 출·퇴근시간이 기록되는 타임카드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를 근거로 미지급 초과근로수당을 요청했다. 그럼에도 '증거 부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회사가 "자발적으로 일했다"는 증인들을 앞세워 초과근로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가 초과근로수당 진정을 반려하자 회사는 곧바로 출·퇴근 기록기를 없앴다. 표면적으로 "출·퇴근 기록기는 한 사람이 타임카드를 모아 일괄로 처리하는 문제가 있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노동계는 초과근로 증거를 없애려는 의도로 보고 있다. 이현숙 마트산업노조 롯데마트지부 사무국장은 “현재 스마트폰 근태관리 앱으로 출·퇴근시간을 기록을 하는데 관리자 사전승인 없이는 초과근로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초과근로가 많은 부서는 사유서를 제출해야 하기 때문에 공짜노동이 지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해법은 충분한 인력채용
“출·퇴근 기록 장치 노동부가 개발하라”


과로사예방센터는 과로를 “둘이 혹은 셋이 해야 할 일을 혼자서 하기 때문에 생기는 육체적·정신적 과부하”로 정의한다. 초과근로 역시 마찬가지다. 두 명 이상 할 일을 혼자서 처리하다보니 정규 근로시간을 넘어서도 일이 끝나지 않아 발생한다. 공짜노동을 없애려면 충분한 인력채용이 선행돼야 한다는 얘기다.

법원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 법원은 근로시간을 “노동자가 사용자 지휘·감독을 받으면서 근로계약에 따른 근로를 제공하는 시간”으로 본다. 사용자가 지휘·감독 사실을 부정하면 초과근로를 입증할 방법이 없다.

윤지영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는 “사용자가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느냐와 상관없이 실제로 일한 시간을 근거로 임금을 지급하는 것이 원칙인데 초과근로 입증이 안 됐으니 임금을 못 준다는 것은 어폐가 있다”고 지적했다. 윤 변호사는 “사용자가 초과근로 사실을 부정하면 노동자가 이를 입증해야 하는데 스마트폰 앱마저 조작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배척되는 현실에서는 쉽지 않다”며 “정부가 공인할 수 있는 출·퇴근 기록장치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노동부가 공인된 출·퇴근 기록관리 시스템을 만들어 보급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노동부는 이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근로기준과 관계자는 “직업훈련기관에서 최근 개발한 출·결 관리시스템을 시범운영 중인데 사업장에도 출·퇴근 기록장치로 사용할 수 있는지 검토해 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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