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석군 변호사(법무법인 민국)

올해 2월 서울아산병원 중환자병동에서 근무하다 목숨을 끊은 고 박선욱 간호사 사건은 간호사들의 ‘태움’에 대한 사회적 환기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아직 변한 것은 없다. 프리셉터(신규 연수기간에 교육책임을 맡은 선임)의 가르침 없이 방치되다시피 했던 신규 연수기간을 거쳐 독립(신규간호사들이 선임자 없이 홀로 환자를 돌보게 되는 것을 말한다) 후 초과근로와 태움, 사망 불과 이틀 전에 있었던 배액관 사고 후 자살에 이르기까지 고인이 처한 상황이 어떤 것이었는지조차 명쾌히 드러난 바 없다.

경찰은 단순자살로 내사를 종결하려다 유가족이 반발하자 일단 내사 종료를 연기했다는 이야기만 흘리고 있다. 병원쪽 관계자들은 고인에 대한 사과나 진실규명은 고사하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이들은 다른 간호사들과 고인 사이에 있었던 카카오톡을 수집해 내부단속을 하고, 유족들이 CCTV를 통해 밝혀내기 전까지 사망 직전 고인과 상급자들 간의 면담 사실을 숨겼다.

간호사들에게 태움은 그 정도와 양상 차이만 존재할 뿐 간호 조직 내에선 어쩔 수 없는 일·문화로 인정되고 있다. 생명을 다루는 업무의 중요성에 비해 심각하게 열악한 노동환경은 간호사 간의 조직적인 괴롭힘 문화를 만들어 왔다. 개선되지 않는 노동환경은 개인들이 불합리한 조직문화에 저항하기보다는 일을 그만두고 떠나거나 가해자로 동참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있다. 결국 간호사들은 조직 내 역할에 따라 피해자로 태움을 당하고 가해자가 돼 태우는 악습 속에서 공범자로서 서로 침묵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악습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구성원 개인의 노력은 물론이고 시스템 변화가 함께해야 한다. 그러나 신규간호사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을 무책임하게 방치했던 병원은 개선대책을 마련하기는커녕 사건 자체를 고 박선욱 간호사 개인 성격 탓으로 돌리며 내부 단속에 열을 올리고 있을 뿐이다. 이 사건 이후 발표된 보건복지부의 간호사 근무환경 및 처우개선 대책은 열악한 간호노동의 현실을 개선할 실효성 있는 대책보다 고용유연화를 통해 간호인력 유입 확대를 꾀하려 한 지나간 정책의 반복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모두의 목소리가 더욱 필요하다. 태움 같은 명확한 증거가 남기 어려운 직장내 괴롭힘에 대한 법적 대응은 개인이 혼자 감당하기 어렵다. 이런 사실을 증언해 줄 사람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누군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혹자는 말한다. “다들 알고 있었던 일 아니냐. 힘들지만 다들 잘 견뎌 냈다. 왜 이것만 특별한 것처럼 시끄럽게 구느냐”고. 특별하지 않은 생명, 특별하지 않은 삶은 없다. 다들 힘들었다면 힘들게 살아왔다면 더욱 이러한 고통을 지속해서는 안 될 일이다. 지금 이 시끄러움을 감사하고 더욱 시끄럽게 이야기하는 데 동참해야 한다.

국제간호사의 날인 5월12일 오후 5시 서울 청계광장 소라탑 앞에서 간호사들의 집회 ‘간호사 침묵을 깨다’가 진행된다. 이 집회는 “나도 너였다”를 외치며 고 박선욱 간호사를 죽음으로 이끈 노동환경을 비판하고 개선을 요구한 올해 3월 집회의 연장이다. 추모를 넘어 간호사들이 구조적 문제에 적극적인 의견을 표출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침묵을 깨 나가는 지속적인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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