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1990년대 후반부터 우리 사회에서 ‘386세대’라는 말이 널리 사용됐다. 이 단어는 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이라는 말을 조합한 것이다. 나이뿐 아니라 대학생 학번을 기준으로 세대를 구분했으므로 대학생이 아니었던 사람은 같은 연령대 사람이라도 이 세대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 세대 규정은 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면서 학생운동을 통해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사람들을 통칭하기도 하고, 더 좁게는 그 세대 사람들 가운데 운동권에 속한 사람들을 지칭하며, 더욱 좁게는 그런 운동권 사람들 가운데 정치권에 들어간 사람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모두 우리 사회의 엘리트다.

386세대가 지금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다. 386세대 선두주자로서 지난 대선 당시 더불어민주당의 유력한 대선후보였던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는 미투운동 회오리 속에서 성범죄자로 급전직하했다. 10대인 고등학생 때 시위 주동으로 제적된 전력을 가진 그는 고려대 학생운동 출신으로서 일찌감치 정치권에 투신해 고 노무현 대통령 비서를 역임하고, 충남도지사를 연임하고 있었다.

386세대의 또 한사람의 대표주자는 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이다. 그는 참여연대 창립멤버로 사무처장을 지냈다. 2012년 통합민주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 자리에 올랐으며, 지역구 당내 경선에서 패배해 정치 2선에 물러나 있다가 금융감독원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러나 국회 임기가 끝나기 직전에 국회의원들이 만든 싱크탱크인 더미래연구소에 5천만원의 후원금을 낸 것이 문제가 돼 감독원장 등극 2주일 만에 낙마했다. 그는 혁명적 노동운동가의 길을 걷다가 시민운동가를 거쳐 정치인이 된 사람이다. 서울대 학생운동 출신으로서 지금은 북한민주화운동을 하고 있는 김영환이 주도한 지하혁명조직인 구국학생연맹 멤버였다.

이 정도로 386세대 주요 인물 몇몇의 추락을 언급했다. 그들은 모두 한때 열렬한 혁명가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알가(R가, Revolutionary)라고 불렀다. 그것도 단순한 민주주의 혁명가가 아니라 민족해방 혁명가이고 사회주의·공산주의 혁명가였다. 김영환은 노동운동을 지도한답시고 북한방송을 받아 적어 <강철서신>을 제작·배포했다. 김기식은 6년간 인천남동 공단에서 위장취업해 현장 노동운동을 하고 노동상담소에서 노동운동을 지도했다. 그러나 이들은 구소련의 스탈린주의 체제가 붕괴하자 혁명의 고양기에 급격히 혁명으로 쇄도했던 만큼이나 급격하게 혁명으로부터 철수했다. 민중민주파는 소련이 무너지기 전인 89년 동독이 무너질 때부터 혁명에서 철수하기 시작하다 91년 소련이 붕괴되자 썰물처럼 철수했다. 민족해방파의 철수는 그것보다 조금 늦었지만 93년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범민련을 청산하더니, 94년 고 김일성 북한 주석이 사망하면서 대대적으로 철수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변절을 이렇게 변호했다.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열심히 싸우는 과정에서 그의 마음속에는 오히려 다른 생각이 싹텄다.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다 해고되고 감옥 가는 분들을 보면서 내가 이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한계와 회의가 느껴졌다. (…) 이념이 아닌 먹고사는 문제로 투쟁하는 사람들의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려면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가진 이념보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서민들의 생활이 더 중요하고, 그런 사람들의 권리가 보장되도록 하는 것이 이념보다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었다(<월간중앙> 2004년 5월호 인터뷰). 혁명가에서 시민운동가로, 변혁주의자에서 이른바 개량주의자로의 변신이었다.”(<한겨레> 4월21일자 ‘뉴스분석 왜? 김기식의 30년’)

이 분석에서 거짓말은 없다. 그러나 비판적이지 않고 변호론적이다. 이 신문의 편집진이나 고참기자들 또한 위의 사람들과 같은 길을 걸어왔던 탓이다. 변호론의 입장에 서다 보니까 인과관계를 밝히는 데 철저하지 못하다.

386세대 운동가들은 왜 갑자기 김기식과 같은 생각을 했는가? 거기에는 주관적·객관적 요인이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객관적 요인으로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 사회주의의 붕괴가 미친 패배주의의 작용이다. 또 이것과 결부된, 민주화 이행을 통한 포섭전략의 작용이다. 이런 두 작용과 효과는 한국만이 아니라 80년대에 혁명운동이 폭발적으로 고양됐던 필리핀 같은 나라에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그곳에서도 빨간색 대신 노란색이 물결쳤다. 극히 기회주의적인 부분은 빨간색을 찬탈한 극우로 갔고, 덜 기회주의적인 부분은 노란색 중도우파로 갔다. 그보다 덜 기회주의적인 부분은 주황색 중도좌파로 갔다.

그러면 이들이 이렇게 패배주의에 빠져 각종 기회주의로 변절한 데에는 어떤 주관적 요인이 작용했는가. 그 대답의 실마리를 김기식의 고백이 잘 보여준다. 그들은 자칭 혁명가였으되 스스로는 노동계급 대중이 아니었다. 그들의 정체성은 유명 대학교 출신 엘리트였으며, 노동자 대중을 대리해 혁명을 지도하고 만들어 가는 존재였다. 노동현장으로 ‘존재 이전’을 했더라도 이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혁명 엘리트로서의 성공 가능성이 옅어지자 이들은 기꺼이 혁명에서 손을 떼고 개량과 출세의 길로 내달렸다.

엘리트와 대중으로 위계화된 운동은 노동자 대중의 해방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이 규약에서 밝혔듯이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스스로에 의해 전취돼야” 하며, 노동자 대중 스스로만이 그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그런 낡은 대리주의 노동운동 시대는 지났다. 촛불대중은 대리주의를 거부했다. 안희정·김기식의 예에서 보듯이 노동자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하는, 맞출 수 없는 그들은 이미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다만 노동계급의 진출이 미진한 탓에 당분간 그들이 대리자 구실을 하고 있을 뿐이다.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seung742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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