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머리 위 냉면 국물은 찰랑거릴 뿐 넘치는 일이 없다. 흐트러짐 없이 자연스러운 걸음걸이는 마치 패션쇼 런웨이의 그것과 닮았다. 하루 이틀 솜씨가 아닐 테다. 오랜 노동의 성취였다. 시장통 흔한 풍경이다. 늙은 엄마도 한때 고춧가루며 참깨 자루를 머리에 이고 다녔다. 한 손엔 비닐 주머니를, 또 한 손으로는 어린 자식 손을 잡아 챙겨야 했으니 곡예는 필요한 만큼 자연스러웠다. 엄마는 참 많은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다. 공장에서 주야 맞교대로 밥 짓는 일을 하고 돌아와 또 여섯 식구 밥상을 꼬박 차려 냈다. 김치볶음과 감자볶음에 직접 담근 단무지 썰어 네 아이 도시락을 쌌고 집을 치웠다. 고기와 전 부치고 유과를 튀겨 내 조상님 밥상도 종종 차렸다. 무·배추·고추 따위 밭에 키워 내 김치를 담근다. 콩 심어 메주를 쑨다. 간장·된장·공장장 역할을 여태 한다. 일과 가정을 빈틈없이 꾸렸지만 그건 당신에게 가혹한 일이었다. 엄마는 지금 볼품없이 늙어 여기저기가 아프다. 놀라운 일이었지만 ‘워너비’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워라밸’이라고 일-가정 혹은 일-삶의 균형이 요즘 추세라던데, 뭐든 척척 아무렇지도 않게 해낸 엄마가 그건 참 못했다. 밥 먹는 일이 제일 중요했던 엄마는 지금도 밥 챙겨 먹었는지부터 묻는다. 딸아이 챙겨 오늘은 또 뭘 해 먹이나 고민 깊던 나는 허둥지둥 햄 굽고 간편식 국 끓이고 냉동 밥을 데운다. 한 끼를 때운다. 잘 챙겨 먹이고 있다고 전화로는 거짓말했다. 밀린 설거지 해치우느라 그릇 탑이 잔뜩 높은데 한순간에 그만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사기 접시 여기저기 이가 나갔다. 균형 잘 잡는 게 어렵고 또 중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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