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호 한국노총 교육선전본부 실장

일본의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기타노 다케시는 젊은 시절 포르셰 자동차를 너무나 갖고 싶었다. 돈이 생기자마자 차를 구입한 그는 막상 차를 타 보고 깜짝 놀랐다. 포르셰를 탔더니 그토록 원했던 ‘나의 포르셰’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기타노 다케시는 친구를 불러 내 자동차 키를 건네면서 “이 차로 고속도로를 달려 줘”라고 말했다. 그리곤 택시를 타고 그 차를 뒤쫓아 가면서 택시 운전기사에게 자랑했다. “좋죠? 저 포르셰, 내 거예요.” 기사가 깜짝 놀라며 “왜 직접 안 타냐”고 묻자, 그는 대답한다. “바보군요. 내가 타면 포르셰가 안 보이잖아요.”

홍세화 선생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는 정반대 이야기가 나온다. 프랑스 파리의 한 노신사는 매일 점심때가 되면 에펠탑 1층 식당에 와서 식사를 했다. 그가 한 달 동안 매일 찾아오자 식당 주인이 묻는다. “손님은 우리 식당 음식이 그렇게 좋으신가요?” “아니오.” 식당 주인은 다시 묻는다. “그러면 에펠탑을 참으로 좋아하시는군요?” 그러자 노인은 차가운 목소리로 “난 에펠탑을 아주 싫어하오”라고 대답했다. 식당주인이 “그런데 왜?”라고 물으니 노인은 이렇게 대꾸한다.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식당이 여기뿐이라서 그렇소.”

보고 싶은 것을 보기 위한 기타노 다케시의 행동과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기 위한 파리 노신사의 그것은 개인 취향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우리는 모두에게 보이지만 권력과 자본을 이용해 숨기고 가려 온 문건들이,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닌 수천 개가 쏟아져 나온 사실을 접하게 됐다. 검찰은 삼성의 ‘다스 소송비 대납’ 수사를 하다가 ‘노조파괴 문건’ 6천건을 발견했다. 그동안 삼성은 6천건의 문서로 하늘을 가려 온 것이다.

설립 이래 삼성은 무노조 경영을 펼쳐 왔다.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인 노동 3권은 삼성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삼성의 무노조 경영은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부터 이어져 왔다.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노조는 안 된다”는 이 회장의 말은 그의 눈에 흙이 들어간 지 30년이 넘게 지켜지고 있다.

이 발언은 1977년 ‘제일제당 미풍공장 사건’부터 나돌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종 업계의 절반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 미풍공장 노동자들이 노조를 설립하자 오늘날 삼성의 첫걸음인 당시 제일제당은 친인척을 겁박하고, 노조를 탈퇴하지 않는 노동자들은 노노 갈등을 유발해 ‘왕따’로 만들었다.

이러한 노조 탄압 방식은 30년이 지나도록 그대로 유지됐다. 삼성은 노조가 만들어지면 감시·미행·협박 등 불법적인 행동을 앞세워 지속적인 회유와 압박을 통해 고사시키는 한편, 기존에 만들어진 어용노조를 활용해 노노 갈등을 유발하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 왔다.

이러한 부당노동행위들이 지속 가능했던 것은 ‘또 하나의 가족’인 삼성장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눈감은 검찰, 뒷짐 진 고용노동부, 기쁨조 언론은 헌법 위 삼성공화국을 유지시키는 일등공신들이다.

그러나 광장의 촛불로 세상과 정권이 바뀌고 나니 이제 가려진 하늘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이 와중에도 일부 보수언론은 여전히 부역을 자처하고 있다. 노조 와해공작 문건이라는 명백한 증거 앞에 조중동과 문화일보는 침묵으로 힘을 보탠다. 한국경제는 사설로 한 가족이었던 검찰에 대해 ‘합리성’이 결여된 수사라며 “검찰이 재조사에 나선 것은 ‘친노조’ 성향의 현 정부를 지나치게 의식한 결과”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검찰의 재수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편치 않다”며 삼성의 심정을 대변한다.

과연 무노조 경영이라는 30년 적폐 유훈은 대명천지에서 낱낱이 드러날 수 있을까. 기타노 다케시의 포르셰든, 파리 노신사의 에펠탑이든 존재해 온 노조탄압이 밝혀지고 존재해야 할 노동자 권리가 지켜지는 모습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

한국노총 교육선전본부 실장 (labor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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