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금속노조 경기지부 집행위원(<노멀 레볼루션> 저자)

“문재인 정부는 완전 친노동 정부다.” 지인들이 만난 자리가 편해서일까. 아니면 노동계 사람이 앞에 있으니 의도적으로 한 말일까.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기업에서 한자리 차지한 그들은 자리가 무르익을수록 본심을 드러낸다. 비정규직 정규직화 문제를 거쳐 최저임금 인상 문제에 이르니 흔히 들을 수 있는 반론을 펼친다.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론’을 들먹이니 심지어 “문재인 미친 XX”라고 한다. “그래 봤자 어차피 대통령은 5년 임기 계약직 아니냐”고 한다.

소득주도가 아닌 소득도주!

비공식 자리 뒷담화라면 좋겠지만 정부 정책에 대한 재벌자본의 반격은 완강하고 질기다. 1위 재벌기업 현장을 들여다보니 오래전부터 상여금이나 성과금을 없애고 기본급에 포함시켜 왔다. 정부가 최저임금을 아무리 올려도 임금을 더 올려 주지 않고 그냥 뒷짐 지고 있으면 끝이다. 최저임금법 위반한 것 전혀 없고 정부 정책 위반한 것도 전혀 없으니까. 정작 직원들은 “오히려 임금이 깎였다”고 느낀다. 소득이 주도(主導)하는 경제가 아니라 소득이 도망가는 소득도주(逃走) 경제다.

2위 재벌기업에 납품하는 협력업체는 최저임금만큼 올려 주던 임금을 올해는 한 푼도 올려 주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이 1천60원 올랐으니 내심 임금 좀 오르겠다 기대했는데 완전 실망했다. 최저임금법 위반이니 제소하자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회사는 “그룹 방침”이라고 선을 그었다. 어디서 교육을 좀 받았는지 “제소해 봐, 우린 최저임금 계산하는 기준시간이 월 240시간이었는데 노동부는 209시간이야. 법원 판례는 174시간이라고. 174시간으로 계산하면 한 푼도 올려 주지 않아도 된다고. 오히려 니들이 최저임금 넘는 액수를 내놔야 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기가 막힌다. 소득도주를 넘어 소득강탈 마인드다.

반격은 주도면밀하게

1위 재벌 3세가 구속됐다가 풀려나자 재벌을 비껴가는 사법잣대에 대해 말이 많았다. 역시 재벌 1위 그룹답게 재판에 대응했다고 자평했을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조심했지만 복합적인 함수처럼 얽힌 관계를 활용해 황제를 구출해 낸 특공대처럼 뒤풀이를 열었을지 모른다.

2위 재벌그룹은 최근 지배구조 개편을 발표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일감 몰아주기 지적을 해소한다면서 3세 승계작업에 나선다. 명분을 내세워 목적을 달성하는 솜씨를 탓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밖으로는 이렇게 난리를 치면서 안으로는 최저임금 인상을 무력화하는 딴짓을 하고 있으니 유감이다.

구조조정은 기업권력에게 호재다. 기업과 경제가 위기라고 떠들면 주도권을 경제권력과 경제부처가 틀어쥔다. 금호타이어에서는 노동자의 양보를 받아 낸 뒤 해외자본에 매각하는 과거 공식이 단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쌍용자동차 해고자 복직은 미뤄졌다. 또다시 굶으며 처절하게 부딪치는 상황이다. 공장폐쇄를 압박하는 한국지엠 구조조정은 핫이슈다. 예전부터 어려웠던 조선산업 곳곳에서 터지는 구조조정은 “경제와 기업이 어려운데 무슨 얼어 죽을 소득주도 성장이고 비정규직 정규직화냐”는 목소리를 키우기에 딱 좋은 호재다. ‘실업 공포’는 노동자를 다스리는 그들의 무기다. 자기주도 프레임 없이 맞장 뜨는 노동자는 늘 쓰린 결과를 맛보게 된다.

남북관계 전환도 반격 불꽃놀이

반혁명 동맹은 여전히 강하다. 재벌기업 권력과 5년 계약직 정권보다 질긴 관료 권력이 탄탄하다. 한때 노동문제를 같이 들여다보던 유력한 여당 정치인은 앞장서서 근로기준법 후퇴 개정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벌써 수도권 변두리에 있는 내게 “아무개 장관은 생각이 바뀌고 있다”는 말이 그들을 통해 들린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후 지인이 청와대에 들어간 사람들 명단과 경력을 보내 준 적이 있다. 놀랍게도 과거 운동권 경력을 가진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 그중에서도 ‘통일’을 중시하던 사람이 절대 다수였다.

전쟁위기로 치닫던 남북관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다. 정말 소중한 진전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반격을 노리는 사람들은 호재로 활용한다. 그들은 "정권이 관심을 쏟아야 하는 문제는 바로 그거야. 성과는 그곳에서 남기면 돼. 남북관계에서 맘껏 축포를 쏴. 경제문제를 너무 심하게 다루지 마"라고 속삭인다.

하후상박이 쪽박 되지 않기를

노동계는 노정관계와 노사정 대화를 위한 논의를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촛불시민혁명으로 탄생한 정권이니 과거와 다르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기층의 시각과 감각을 잊으면 낭패를 볼 수 있다.

금속노조는 대기업은 임금을 조금 올리고 중소기업은 임금을 많이 올리는 '하후상박'을 요구한다. 긍정적 변화다.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한다. 대기업이 임금을 조금 올린다고 해도 시민들이 보기엔 여전히 많다고 생각할 수 있다. 대기업이 조금 올리면 힘없는 중소기업은 임금을 많이 올릴 재간이 없다. 재벌은 벌써 다단계 하청공장에서 상여금을 없애고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이유로 지난해 최저임금에서 한 푼도 올려 주지 않고 버티고 있다.

다단계 바닥에 있는 노동자 임금을 오르게 할 구체적 대책이 없다면 ‘하후상박’은 ‘쪽박’으로 끝날 수 있다. 한국 사회 문제는 임금격차 따위가 아니다. 권리격차가 더 문제다. 권리를 가진 노조는 이렇게 저렇게 해 볼 요량이라도 있지만 노조 없는 '무권리 노동자'는 무슨 정책이 결정되든 결국 편법에 당한다.

노멀 레볼루션!

삼성에서 노조파괴 증거자료가 6천건이나 발견됐다고 한다. 헌법과 법률이 보장한 노조할 권리를 80년이나 부정하는 재벌그룹이 있다는 사실에 경각심이 없는 나라, 이건 인권과 권리를 모르는 나라다. 삼성이 무노조 동굴 안에 있는 한 노동시민의 권리가 획기적으로 개선될 수 없다. 삼성이 어두운 무노조 동굴에서 벗어나 밝은 권리의 세상으로 나오기를 촉구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최저임금 인상, 하후상박 임금정책을 비롯한 각종 정책이나 제도는 권리를 누리는 주체가 없으면 대부분 말잔치에 그친다. 더 나은 정권, 더 좋은 정책도 중요하지만 문제는 자력화다. 진보든 노조든 노동시민이 일터에서 권리주인으로 자력화를 해야 한다. 세력화가 아니다.

탄핵촛불시위가 한창이었을 때 한 청년이 시민 앞에서 했던 말이 기억난다. 박근혜 대통령이 물러나면 승리하는 것이냐고, 여전히 비정규직으로 최저임금을 받고 살아가는 내 삶이 바뀌지 않으면 우리의 촛불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그 말.

내 삶이 바뀌지 않으면 혁명이 아니다. 정권이 바뀌고 국정농단을 파헤친다고 해도 내 삶을 짓누르는 생활농단이 바뀌지 않는다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바꾸는 노멀 레볼루션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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