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4·3평화공원에 위치한 조형물 <비설>. 군인에게 쫓겨 두 살 난 젖먹이 딸을 등에 업고 피신하다가 총에 맞아 죽은 모녀를 형상화했다. 연윤정 기자

제주국제공항에 발을 내딛는 순간, 춥고 탁한 서울과는 사뭇 다른 공기가 뺨을 스쳤다. 따뜻한 햇살, 활짝 핀 동백꽃이 일행을 맞아 줬다. 제주 사람들은 예전에 이곳을 정뜨르 비행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알고 보니 정뜨르 비행장도 제주4·3 당시 끔직한 학살의 현장이었다지.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23~24일 1박2일간 제주4·3 평화기행 동행취재를 다녀왔다.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회가 한국기자협회 소속 언론인을 초청했다. 제주도기자협회가 주관했다.

이번 평화기행 가이드를 맡은 윤순희 제주생태관광 대표는 “올해 제주4·3 70주년 캐치프레이즈는 '제주4·3은 대한민국 역사입니다'”라며 “제주를 넘어 전국으로, 세계로 제주4·3을 알리고자 이번 평화기행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제주4·3평화공원을 찾다
토벌대에 의해 젖먹이 안고 죽은 어미


우리는 제주4·3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2000년 제정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4·3사건법) 2조(정의)에서는 “제주4·3사건이란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고 규정한다.

제주4·3평화공원 안내판. 뒤에 보이는 건물이 제주4·3평화기념관이다. 연윤정 기자

이것만으로는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일행은 첫 방문지인 제주4·3평화공원에서 대략의 궁금증을 풀 수밖에 없었다. 2008년 개관한 제주4·3평화공원에는 위령제단·위패봉안소·추모광장·유해봉안관·각명비·행방불명자비·조형물, 그리고 제주4·3평화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4·3이 되면 희생자 위령제가 열린다.

일행은 외부에 있는 기념물을 보면서 기념관으로 가는 코스를 택했다. 먼저 '비설'이란 제목의 조각품이 설치된 공간을 찾았다. 초토화 작전이 벌어지던 1949년 1월6일 2연대 토벌작전 속에서 군인에게 쫓겨 두 살 난 젖먹이 딸을 등에 업고 피신하다가 총탄에 쓰러진 모녀를 모티브로 만들었다. 하얀 눈밭에서 아이를 끌어안고 죽어 가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나사형으로 조성된 진입로 벽에는 제주 자장가인 <웡이자랑>이 음각돼 있다.

다음 발길은 각명비로 향했다. 위령탑을 둘러싼 통로벽에 제주4·3 희생자 1만4천231명의 이름과 성별·연령·사망일을 새겨 넣었다. 4·3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죽음의 사실을 기록하는 의미를 담은 기념물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의 자’ 또는 ‘○○○의 제’라고 쓰인 이름 없는 한두 살 젖먹이 아이들도 꽤 보인다.

일행은 이어 4·3 당시 민간인들의 죽음의 이미지와 망자의 수의를 모티브로 한 '귀천'이란 조형물에 다다랐다. 어른 남녀·청소년 남녀·아기 수의를 형상화했다. 4·3 때 어른·아이 구분 없이 희생된 것을 상징한다. 토벌대가 학살한 자리에서는 죽은 어미의 빈 젖을 빨고 있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유독 많다고 한다. 일행은 잠시 묵념했다.

윤순희 대표는 “10세 이하 어린이가 많이 죽었다”며 “올해 희생자 추가신청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아직 이름을 찾지 못한 제주4·3
미군정, 제주를 “레드 아일랜드”로 낙인찍다


기념관에서는 좀 더 체계적인 제주4·3을 만날 수 있다. 4·3의 시작부터 끝, 그 이후를 일대기별로 소개하고 있다. 모두 6관과 특별관으로 구성돼 있다.

제주4·3의 역사를 찾아가는 관문인 1관 ‘역사의 동굴’에 들어서면 ‘백비(비문 없는 비석)’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정명(正名)되지 못한 4·3을 상징한단다.

제주4·3 희생자로 확인된 1만4천231명의 이름과 성별·연령·사망일이 새겨진 각명비. 연윤정 기자

정명되지 못한 4·3이라니. 그렇지 않아도 궁금하던 차였다. 과거 ‘4·3항쟁’이란 표현을 많이 봤는데 최근 자료조사를 하면서 그런 표현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주4·3사건’이란 표현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윤순희 대표는 “과거 4·3 뒤에 폭동·정변·사태·사건·혁명·항쟁 등 다양하게 붙었지만 현재는 이름을 달지 못하고 있다”며 “무장대와 군인에 의한 희생에 대한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소개했다. 올해 ‘제주4·3 70주년’이라고 표현한 이유라고도 했다. 기념관에도 “4·3의 진정한 해결이 이뤄지는 날, 비로소 비문이 새겨질 것이며, 누워 있는 비석도 세워질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제주4·3은 왜 이름을 얻지 못하는 걸까. 그 깊고 복잡한 역사를 보자. 기념관과 제주4·3평화재단에 따르면 1947년 3월1일 제주 관덕정 근처 북국민학교에서 열린 3·1절 기념대회에서 민간인 6명이 경찰 총격으로 사망했다. 민심이 극도로 악화됐지만 미군정과 경찰은 사태를 수습하기보다 시위 주동자를 검거하는 일에 주력했다. 경찰 발포에 항의하는 3·10 총파업이 시작됐다. 민·관 직장인 95%에 해당하는 166개 기관·단체 4만1천211명이 동참했다.

그해 3월14일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이 총파업 와해를 위해 들어왔고, 미군정은 곧이어 전남북과 경기도에서 수백명의 경찰을 투입했다. 조병옥은 같은달 19일 담화문을 통해 “경찰 발포는 정당방위이며 이 사건은 북조선과의 통모로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이로 인해 미군정은 제주도를 “레드 아일랜드(빨갱이 섬)”로 낙인찍었다.

미군정은 3·1절 사건 처리 과정에서 제주도 고위관리를 극우성향 인물로 교체했다. 외지 출신 신임 도지사 유해진은 극우청년단체 서북청년회(서청)를 끌고 들어왔다. 1948년 초 760명에 이르는 서청 단원은 경찰·행정기관·교육기관을 장악하고 ‘빨갱이 사냥’을 구실로 테러를 일삼으며 제주도를 휘저었다. 3·1사건 뒤 한 달간 500명이 체포·245명이 수형됐고, 4·3까지 1년간 2천500명이 검속됐다.
 

제주4·3평화기념관 관문에 놓인 백비(비문 없는 비석)다. 정명(正名)되지 못한 4·3을 상징한다. 연윤정 기자

제주도민 탄압과 단독선거 반대하며 무장봉기
송요찬의 포고령과 죽음의 전주곡


해방 뒤 정치적인 상황도 제주도를 뒤흔들었다. 1948년 1월 남한의 단독선거 실시가 확실해지면서 남한 내 많은 정당과 단체에서 반대성명을 내며 반발했다. 단독선거를 실시하면 한반도가 영구히 남과 북으로 분단될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5·10 단독선거 확정에 반발하며 전국에서는 유혈사태가 이어졌다. 제주에서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의 봉화가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12개 경찰지서와 우익요인 집을 습격했다. 이들은 호소문에서 “탄압이면 항쟁이다. 제주도 유격대는 인민들을 수호하며 동시에 인민과 같이 서고 있다” “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해 궐기했다”고 밝혔다.

민족주의 성향의 9연대장 김익렬은 이 사건이 경찰과 서청의 횡포로 야기된 것으로 판단하고 무장대와 평화협상을 시도했지만 미군정 하지 사령관은 무력진압 방침을 결정한다.

평화협상 직후인 5월1일 오라리 마을 방화사건이 발생하면서 평화협상이 파기된다. 이 사건은 우익청년이 저질렀지만 미군정과 경찰은 “폭도들이 했다”고 조작했다. 그리고 김익렬이 전격 해임된다. 새로 연대장에 취임한 박진경은 6월 중순까지 6주간 4천명을 체포했다. 그럼에도 5·10 단독선거는 다수 제주도민의 거부로 무산됐고, 미군정은 6·23 재선거마저도 실패한다.

그런데 1948년 8월15일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다. 이승만 정부는 10월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육지 군병력을 증파했다. 같은달 19일 제주도에 파견하려던 여수 14연대가 반기를 들었다. 그해 11월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다.

송요찬이란 이름이 등장하면서 제주도는 학살의 땅이 된다. 새로운 9연대장 송요찬은 10월17일 “해안선에서 5킬로미터 이외에 있는 사람은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총살하겠다”는 포고령을 발표한다. 중산간지대에 사는 주민에게 울리는 죽음의 전주곡이었다.

윤순희 대표는 “제주 사람들은 대체로 근거리혼을 한다”며 “중산간마을 사람들이 해안마을로 안 간 이유고, 잘못한 게 없기에 잠깐만 피하면 된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초토화작전, 민간인 학살로 이어져
7년7개월 만의 4·3 종료, 3만명 희생


송요찬은 초토화작전을 벌인다. 1948년 10월부터 49년 3월까지 5개월 동안 주민들을 상대로 한 집단 살상이 자행됐다. 토벌대는 중산간마을이 무장대에 협조하고 있다면서 100여개 마을을 강제로 불태웠다. 재단은 “4·3 전 기간 동안 희생자는 2만5천~3만명으로 추정되는데 초토화작전 이전 사망자수가 1천명”이라고 밝혔다. 초토화작전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를 드러내는 수치다.

1948년 12월 말 토벌대와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됐지만 함병선 2연대장도 강경진압을 이어 갔다. 2연대 3개 대대 중 3대대는 서청 단원들로만 꾸렸다. 1949년 1월17일 3대대는 북촌마을 주민들을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 350명을 집단 총살했다.

제주4·3 당시 11살로 토벌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경험한 생존자 홍춘호 할머니가 ‘잃어버린 마을’ 동광마을에서 70년 전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연윤정 기자

무장대 보복도 이어졌다. 무장대는 무차별 초토화작전 이후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토벌대 편이라고 판단하고 일부 마을을 지목해 주민들을 살해했다.

1949년 3월 “귀순하면 살려 준다”는 토벌대 선전과 “하산해도 과거처럼 무조건 죽이지 않는다”는 소문에 주민 1만여명은 백기를 들고 하산했다. 하지만 그들은 길고 비참한 집단수용소 생활을 하거나, 사형·중형을 받고 전국 각지 형무소로 흩어졌다. 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형무소 재소자와 입산자 가족은 예비검속으로 처형됐고, 행방불명자도 다수 발생했다. 많은 제주도민이 살려고 일본으로 밀항하기도 했다.

무장대도 소멸됐다. 49년 6월7일 무장대 총책 이덕구가 사살됐고, 52~53년 한라산 기슭 곳곳에서 무장대 토벌전을 벌였다. 54년 9월21일 제주도경찰국장이 한라산 금족 지역을 해제·개방을 선언하면서 7년7개월 만에 제주4·3은 막을 내렸다.

윤순희 대표는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희생자수는 1만5천명 정도지만 4·3 이전과 이후 인구통계상 3만명 이상 차이가 난다”며 “2만5천~3만명은 여기에 근거한다”고 설명했다.

제주4·3 희생자 2만5천~3만명은 당시 제주도민의 9분의 1을 차지하는 수치다. 기념관에 따르면 공식 인정된 1만5천명 중 86%가 토벌대에 의해 희생됐다. 어린이·노인·여성 등 노약자 희생이 33%를 차지한다. 꽉 막히고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고 기념관을 빠져나왔다.

지슬 생존자와 ‘잃어버린 마을’을 걷다
“동굴에 숨어 짐승처럼 살았다”


레드 콤플렉스. 제주4·3이 제주도민에게 남긴 유산이다. 제주4·3이 오랜 시간 침묵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다음날 찾아간 제주 안덕면 동광마을 무등이왓에서 만난 올해 81세 홍춘호 할머니를 통해 주민들이 어떤 희생을 겪었는지 엿볼 수 있었다. 동광마을은 토벌대에 의해 불태워진 ‘잃어버린 마을’이다. 홍춘호 할머니는 이번 평화기행의 제목 “당시 11살 소녀가 기억하는 제주4·3”의 주인공이다. 영화 <지슬>의 생존자이기도 하다.

“그날 순경이 마을로 찾아와 남자들은 다 나오라고 했지. 전달할 게 있다면서.”

초토화작전이 한창이던 1948년 10월 중산간 동광마을의 11살 소녀 홍춘호는 그날을 목격했다. 그는 최초의 학살터 앞에 서서 “남자들 10명이 모였는데 한 사람은 눈치가 빨라 도망쳐서 살고 9명이 죽었다”며 “원물오름에 다녀온 남자 1명이 더해 죽어 모두 10명이 죽었다”고 말했다. 홍춘호 할머니는 “총소리라고는 들어보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집에서 나와 보니 피가 벌겋고 이렇게 됐다”며 “사람들이 울고불고했다”고 전했다.

홍춘호 할머니가 기억하는 마을은 따뜻하고 행복했다.

“여긴 마을 공고판이야. 제일 넓은 길. 겨울에도 여긴 따뜻하니까 남자애들이 여기서 놀았지.”

하지만 토벌대는 마을을 전부 불태웠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도망쳤다. 할머니네 가족도 원물오름 굴속에서 숨어 살았다. 부모님과 본인, 남동생 3명, 사촌언니 모두 7명이었다.

“아버지가 우리를 두 군데 나눠 숨겼어. 한 번에 죽지 말라고. 밤이 되면 아버지가 우리를 데리러 오셨지. 하루 한 끼 밥이나 범벅을 먹었어.”

12월 말이 되면서 너무 추워서 할머니네 가족은 큰 동굴에 숨어 살게 됐다. 입구쪽에는 먼저 와 있던 삼박구석 마을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할머니네는 가장 안쪽에서 살았다.

“숨어 살면서 하루나 이틀에 한 번 아버지가 나가 맷돌에 조 같은 걸 갈아 범벅해서 우리에게 갖다 주셨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이나 고인 물을 빨아 먹었고. 화장실도 없어 아무 데나 쌌지. 세수 한 번 못했고. 목욕은 말할 것도 없고. 짐승처럼 살았어.”
 

섯알오름 학살터. 한국전쟁 발발 뒤 예비검속이란 이름으로 252명을 학살하고 암매장한 장소. 연윤정 기자

“수용소 나왔지만 석방쟁이라고 손가락질”
부모 잃고 어린 남동생과 시집살이 


위기는 찾아왔다. 이듬해 2월 토벌대가 마을 사람을 끌고 와 동굴 입구를 찾아냈다. 토벌대가 동굴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자 사람들이 고추를 태워서 쫓아냈다. 토벌대는 다음날 다시 찾아오겠다면서 동굴 입구를 돌멩이로 막고 돌아갔다. 근처에서 보초를 섰던 청년들이 입구를 열어 주고는 “여기 있으면 다 죽으니까 어디든 가라”고 했다.

동굴에 살던 사람들의 운명이 엇갈렸다. 삼박구석 마을 사람들과 할머니네는 각각 다른 길을 선택했다. 토벌대는 삼박구석 마을 사람들의 눈밭에 난 발자국을 따라가 잡아서 정방폭포로 데려가 다 죽였다고 했다. 할머니네는 다행히 살아남았다.

“아버지가 귀순하면 살려 준다는 삐라(토벌대 선전물)를 봤어. 흰 천 꽂아서 내려갔지. 순경들이 폭도들 귀순해서 잡았다고 좋아했지.”

할머니네는 안덕지서(경찰서)에서 며칠 있다가 천지연폭포 근처 단추공장(수용소)으로 끌려갔다.

수용소에서는 또 배가 고팠다. 부모 잃은 아이들도 많았다. 이들은 식모나 머슴으로 남의집살이를 했다. 사촌언니는 한약방 식모를 했고, 할머니도 순경집 애기업게(보모)를 했다.

“순경집은 밥도 많이 해서 수용소에 있는 엄마 가져다 주라고 하고. 옷도 주고 그랬어. 거기선 무서운 거 모르고 이제 살았구나 했지.”

그해 가을 석방됐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고 했지만 사람들이 ‘석방쟁이’라고 하면서 집을 빌려주지 않아 외양간 같은 곳을 빌렸다. 솥단지 하나 걸어 놓고 이불 없이 지냈다. 하지만 동굴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남동생들이 전부 영양실조로 죽었다.

4대 독자였던 아버지는 다시 남동생을 하나 낳았지만 백일도 안 돼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모진 세월 고생하셨던 아버지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남동생이 9살 때 복막염으로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어린 동생을 데리고 시집살이를 했다. 할머니의 시집은 4·3 유가족이다. 시아버지와 시동생이 희생됐다. 그는 희생자 며느리다.

할머니는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공터에 얼기설기 집을 지었는데 억새지붕 사이로 떨어지는 눈을 맞으면서도 ‘우리 집이어서 좋지’라고 하셨던 게 기억에 남는다”며 “동생을 초등학교밖에 못 가르쳤는데도 잘 자라서 제주에서 소를 가장 많이 기른다”고 뿌듯해 했다.
 

동백은 제주4·3의 상징꽃.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회가 배지로 제작했다. 연윤정 기자

“폭도가 뭔지 몰랐지만 우리를 폭도라고 불러”
강요당한 침묵 딛고 4·3 세상 밖으로


순경은 하산하는 할머니네를 폭도라고 불렀단다. 할머니는 “그때는 폭도가 뭔지 빨갱이가 뭔지도 몰랐다”며 “그냥 내려가지 않았다고 다 폭도라고 했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제주4·3을 말하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때는 4·3을 이야기하지 못했어. 한 10년 됐나. 자식들한테도 말하지 못했지.”

대부분 제주 사람이 그랬다고 했다. 4·19혁명 시기 반짝 나왔다가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하에서 4·3은 금기였다.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제주도 에서 4·3 재조명을 위한 논의가 활발히 일어났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4·3의 원만한 해결을 약속했고 마침내 2000년 4·3사건법을 제정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에 와서 대통령으로서 처음 사죄했다. 2014년 정부는 법정기념일인 ‘4·3희생자 추념일’을 지정·공포했다.

그동안 제주 사람들은 국가보안법과 연좌제 때문에, 자식과 가족에게 피해가 갈까 봐 침묵을 강요당했다. 또한 같은 마을 안에서도 피해자와 가해자가 얼굴을 맞대야 하는 상황도 쉽게 4·3을 꺼내지 못하게 했던 요인으로 꼽힌다. 이 밖에도 당시 4·3을 진압했던 조병옥·송요찬 같은 인물들이 국무위원을 한 것도 4·3을 침묵 속에 가둬 놓게 한 원인이 됐다.

이런 이유로 제주에서는 레드 콤플렉스가 컸다고 한다. 제주 사람들은 한국전쟁 때 적극 해병대로 자원입대했고, 4·3사건법에 의한 희생자를 접수할 때도 기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반면 1978년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을 시작으로 2013년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까지 제주4·3을 알리기 위한 꾸준한 노력이 있어 왔다. 최근에는 TV예능 <알쓸신잡>에서 언급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동광마을은 여전히 ‘잃어버린 마을’이다. 제주4·3 70주년이 됐지만 동네사람들은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할머니는 “여기가 좀 무섭고 거림직해서 동네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며 “우리가 어릴 때 다 살았던 곳인데 나도 무섭다”고 말했다. 제주도에는 이렇게 끝내 복구되지 못한 잃어버린 마을이 109곳에 달한다.

하지만 할머니의 표정은 밝았다. 그는 “지금은 자식들에게 말해도 괜찮다”며 “그래도 내가 오래 살아서 여러분들을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웃었다.

일행은 할머니와의 만남 이외에도 전쟁과 학살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송악산 입구의 진지동굴·고사포진지·섯알오름학살터·알뜨르비행장을 차례로 찾았다.

광화문 문화제·전국 주요 도시 분향소 설치
“4·3 진압작전 지휘·통제한 미국 사과해야”


제주도는 4·3 70주년을 맞아 4·3을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제주도는 “4·3이 전하는 진정한 평화의 의미를 알리는 전국화·세계화에 나선다”며 “사회통합을 위한 추모·위령, 그리고 화해·상생을 통한 평화·인권의 가치로 승화하길 기원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올 한 해 4·3 희생자·유가족 추가신고를 받고, 행방불명인 유해발굴·유전자 감식을 실시한다. 또 국내외 기자 초청 팸투어(현지답사)와 국제합동추모제·특별전·특별공연 같은 다양한 행사를 한다. 무엇보다 다음달 7일 광화문광장에서 4·3문화제를 개최하고, 이달 31일부터 다음달 6일까지 전국 주요도시 20곳에 4·3분향소를 설치한다. 제주를 넘어 서울과 전국 주요도시에서 처음 4·3을 추모하는 자리가 마련되는 것이다.

제주도는 4·3사건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개정안에서는 △공권력에 의한 억울한 희생에 대한 배상과 보상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은 군사재판의 무효화 △4·3 수형인에 대한 명예회복 △진실규명을 위한 추가조사 △트라우마 치유센터 건립 등을 담고 있다.

올해 제주도에서 열리는 70주년 4·3희생자 추념식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어떤 메시지를 던질까.

그래도 남는 과제가 있다. 제주4·3은 왜 발생한 것일까. 도대체 누구의 책임일까.

현재 제주에서는 뜻깊은 서명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회와 제주4·3희생자유족회, 제주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가 ‘제주4·3에 대한 미국과 유엔의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하는 10만 서명운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이제는 제주4·3에 대한 미군정의 책임을 묻고 공식 사과를 이끌어 내야 한다”며 “제주4·3은 미군정 시기 일어난 민간인 대량학살 사건으로 당시 미군정은 제주 현지의 모든 진압작전을 지휘·통제했다”고 주장했다.

이번 평화기행에서 세미나를 맡은 4·3 전문가 허호준 한겨레신문 기자는 “미국은 최소한 사과해야 한다”며 “브루스 커밍스 같은 학자들도 미군정이 직접 지휘관을 파견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한 만큼 미국은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밝혔다.
 

항공기에서 바라본 제주 한라산. 바다 한가운데 불쑥 솟은 한라산을 품은 제주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된 조국에서 비극의 섬이 되고 만다. 연윤정 기자

동백꽃처럼 차가운 땅으로 소리 없이 스러져
잠들지 않는 남도, 4·3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제주4·3의 상징꽃은 동백이라고 한다. 동백꽃은 한겨울 하얀 눈밭에 만개한 상태에서 어느날 툭하고 통꽃으로 떨어진다. 강요배 화백의 4·3 연작시리즈 “동백꽃지다-제주민중항쟁전”에서 등장하면서부터 4·3 상징꽃 이미지를 얻기 시작했다는 평가다. 또 4·3 영혼들이 붉은 동백꽃처럼 차가운 땅으로 소리 없이 스러져 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회가 제작한 ‘제주4·3 유적지도’를 보면 관덕정·다랑쉬굴·큰넓궤 등 제주 전역에 4·3 유적이 촘촘히 자리하고 있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이번 평화기행에 참여한 기자들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한남진 내일신문 기자는 “제주4·3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며 “생존자의 생생한 체험을 들으면서 4·3에 대해 더 풍부히 알게 됐고, 제주4·3이 이름을 얻어 백비가 우뚝 서길 바란다”고 말했다.

언론노조 한국일보지부장을 맡고 있는 배성재 기자는 “그동안 4·3을 모르지 않았지만 이번에 내 가족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라고 깊이 있게 다가왔다”며 “언론인으로서 화해와 치유, 피해자 보상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녁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잠들지 않는 남도 주에서)

그동안 제주4·3 추념식에서는 금지됐다는 <잠들지 않는 남도>가 올해 추념식에서 불린다는 소식이다. 우리는 제주4·3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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