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지영 변호사(법무법인 덕수)

그날도 퇴근 후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습관적으로 TV를 켰다. 드라마 속 풍경은 청량한 여름쯤. 그런데 화면 속에서 주인공이 간 쇼핑몰 건물이 무너졌다. 설마 우리가 아는 그 사고가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은 같이 있던 동생이 먼지바람 속으로 사라지는 꿈을 매일 꾸다 일어났다. 나는 패딩만 벗은 채 자리를 바로잡았다.

장면이 바뀌어 이번에는 어느 부둣가. 한 무리의 노동자들이 어떤 남자의 고함을 듣고 있다. “잘 들어. 그나마 일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다행으로 생각해. 누가 돈이 있는데 안 주나? 저 컨테이너들 쌓여 있는 거 봐. 보관료도 못 내. 압류당한 게 천지야. 지금 상황이 다 힘드니까. 이 고통분담 차원에서 우리가….” 아니 뉴스도 아니고 드라마에서 고통분담이란 말이? 일하고 돈도 못 받았는데 야단까지 맞고 있는 무리 속에서 젊은 남자 외침이 들린다. “우린 개뿔 누린 게 없는데, 그놈의 고통분담은 왜 매번 하바리 취급받는 우리가 해야 되냐고!”

지난해 말과 올해 초 이 드라마에 푹 빠져 지냈다. 제목은 <그냥 사랑하는 사이>. 쇼핑몰 사고로 동생을 잃고 알코올 중독 엄마와 살며 건축모형을 제작하는 여주인공 문수. 같은 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병으로 엄마마저 떠나 사채 빚에 시달리는 남주인공 강두. 둘은 각각 트라우마와 악몽으로, 사고 때 입은 부상과 가난으로, 살아서 ‘고통’받는 생존자였다.

내 몸이 아프니 아픈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갔다.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 속의 에피소드. 가난한 사람 시체를 해부하면 부신이 비정상적으로 커져 있다고 한다. 만성적인 스트레스가 혈중 코르티솔을 높이고, 그 결과 부신이 비정상적으로 커진다. 간혹 의사들이 부자의 시신을 해부하다가 비정상적으로 부신이 작은 경우를 발견했는데, 그들은 부신이 축소되는 질병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병명을 ‘특발성 부신 위측증’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훗날 알려진 대로 그런 병은 없다. 작은 부신이 정상이고, 가난 때문에 부신이 비정상적으로 커진 것이다.

드라마 속 할멈의 대사가 생각났다. 당장 뇌종양수술을 안 받으면 죽는다는 의사 말에 할멈은 외친다(나문희씨 연기는 역시 명불허전이다). “사람이 뭣 때문에 많이 죽는지 아니? 암? 사고? 자살? 사람은 가난 때문에 죽는 거야. 가난해서 병 있어도 치료를 못 받고,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험한 일 하다가 사고로 죽고, 가난이 싫어서 지 목숨 지가 끊고…. 가난 때문에 죽는 거야.” 책 한 권이 드라마 대사 속에 있었다.

새해 인사는 언제나 건강과 행복 기원이다. TV와 인터넷에는 건강정보가 넘쳐난다. 누군가의 말대로 가히 ‘건강교’라는 신흥종교라 할 만하다. 의사는 목사, 일반인은 열혈신도다. 암 극복 강연은 간증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픈 것도, 낫는 것도 다 개인의 문제다.

그러나 책 저자인 김승섭 교수는 달리 말한다. 모든 병은 ‘사회적’인 것이라고. 가난하면 더 많이, 더 자주 아프고 죽는다고. 공동체가 지키지 못한 해고노동자들은 전쟁포로만큼 아팠다. 반도체에 먼지 하나 안 들어간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암에 걸려 죽었다. 사회가 배제한 성소수자들은 존재 자체를 인정받느라 아프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건물주가 아닌 이상 보통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일해야 한다. 그런데 살려고 일하다가 죽는다.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험한 일 하다가 죽고, 일이 너무 많아 쓰러지거나 자살한다.

육체노동이 아닌 사무노동을, 죽을 만큼은 하지 않으니 산업재해는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몸이 아프니 그제서야 아픈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동병상련. '아픔이 길이 되려면'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 길은 다 같이 건강하고 행복한 길일 터. 사고로 고통받는 이들이 ‘그냥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 것도 공동체가 할 일이다. "건강하세요"라는 덕담을 나누면서 아픔과 고통이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사회 문제임을 다시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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