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나영 기자
땅콩 회항사건·공관병 사건·대학병원 간호사 장기자랑 강요사건…. 최근 몇 년 사이 직장내 갑질·괴롭힘 사건들이 잇따라 폭로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폭로는 현실 속 직장 괴롭힘의 일부일 뿐이다. “직장생활 부적응자”라는 말로 직장 괴롭힘 책임이 피해자에게로 돌려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기업들이 성과를 높이기 위해 활용한 권위주의적 조직문화와 직장내 괴롭힘을 제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가인권위원회는 13일 오후 국회 도서관 대회의실에서 ‘직장내 괴롭힘 실태 파악 및 개선방안 모색 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토론회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한정애·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김삼화 바른미래당 의원, 이정미 정의당이 의원이 공동으로 주최했다.

을들의 하소연 가득한 직장

“남편의 상사가 부하 직원들 앞에서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모멸감을 주며 언어 폭행을 했다고 합니다.”

“(상사가) 막말로 명령하고 손가락으로 눈을 찌를 것처럼 삿대질을 하는데 숨을 못 쉴 것 같았어요.”

직장갑질119는 토론회에서 피해자들에게 제보받은 내용을 공개했다. 직장갑질119는 직장내 갑질 문화를 근절하기 위해 지난해 11월1일 출범했다. 직장갑질119는 출범 뒤 지난달 20일까지 이메일과 오픈채팅방(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SNS 단체채팅방)을 통해 3천841건의 제보를 받았다.

제보·상담신청 유형으로는 임금 미지급(1천314건·24.0%)과 직장내 괴롭힘(825건·15.1%)이 많았다. 사소한 이유로 징계·해고(490건·8.9%), 장시간 노동(463건·8.5%), 근로계약서 미작성(203건·3.7%), 성폭력(138건·2.5%)이 뒤를 이었다.

오픈채팅방에는 하소연으로 가득했다. 급식업체 직원 ㄱ씨는 “상사에게 ‘술을 그만 마시고 들어가자’고 하니 상사가 소주병으로 머리를 때리고 주먹으로 때렸다. 도망가도 쫓아오면서 구타해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고 증언했다. 방송작가 ㄴ씨는 “편집에 이의를 제기하자 외주업체 PD가 화장실도 못 가게 하고 12시간 동안 훈계했다”고 토로했다. 한 회사 직원 ㄷ씨는 “사장이 욕설을 해 왔고, 컵을 던져 치운 적도 여러 번 있다”며 “속옷 주문이나 사장 아들 공항 마중 같은 개인적인 일정관리도 평일·주말 관계없이 해야 했다”고 말했다. 전수경 직장갑질119 스태프는 “오픈채팅방에 들어온 사람들은 닉네임으로 ‘돈떼먹지마라’ ‘곧 퇴사예정’ ‘이사에게 복수를’ ‘헬직장탈출’ ‘직장언어폭력’ 등을 썼다”며 “닉네임만으로도 이들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노동자 인격권 침해 막을 방법 없어

문제의 심각성에 비해 구제장치는 미비한 상황이다. 직장내 괴롭힘을 직접적으로 규율하는 법과 제도는 없다. 다만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현행법에 저촉되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처리할 뿐이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법학)는 “가령 회사가 부당노동행위를 하면 관련법 조항에 따라 신고하면 되지만,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하지 않으면서 노동자 인격을 침해할 때는 제재할 방법이 없다”며 “법적 공백이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직장갑질 제재법 마련을 주문하는 이유다. 유정엽 한국노총 정책실장은 “근로기준법·산업안전보건법 등의 개정을 통해 이를 제재할 법적 근거를 만드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고 밝혔다. 홍성수 교수는 “근로기준법 등 기존 법 조항을 일부 바꾸는 형태도 충분히 의미가 있지만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독립적인 법률 도입이 필요하다”며 “예방교육 의무화나 구제기관 설치 등의 내용을 담은 가칭 ‘직장내 괴롭힘 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을 만드는 방법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박진서 경총 노동정책본부 법제1팀장은 “직장내 괴롭힘은 없어져야 한다”면서도 “직장내 괴롭힘 양태가 다양해서 법제화로 실효성을 얻기 힘들다”고 다른 의견을 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법제화와 함께 제재 실효성을 높이는 방법으로 △노조할 권리 보장 △직장내 괴롭힘 문제를 살필 근로감독관 인력 확충 제안이 나왔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