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혈관질병 또는 심장질병 및 근골격계질병의 업무상질병 인정 여부 결정에 필요한 사항. 이 긴 이름의 정부 고시가 최근 개정됐다. 과로 때문에 죽거나 목숨을 끊는 일이 거듭되면서 과로사회를 벗어나야 한다는 논의가 한창이다. 고시 개정은 그런 여론을 반영한 조치다. 산업재해 여부를 심의할 때 과로사로 인정하는 요건을 완화하고, 업무의 질적 요소를 감안하도록 했다. 정부는 의미를 부여하지만 노사는 서로 다른 이유로 미흡하다고 비판한다. 노사정과 전문가 의견을 들었다.

과로 산재에 대한 노동자 입증책임 완화 취지
주평식 고용노동부 산재보상정책과장

주평식 고용노동부 산재보상정책과장

종전 만성과로 기준은 발병 전 12주 동안 업무시간이 1주 평균 60시간을 초과하면 업무 관련성이 강하고, 60시간을 초과하지 않더라도 야간교대근무 같은 기타요인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하도록 했다. 문제는 ‘60시간’만 기억해 60시간이 넘지 않으면 업무 관련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컸다. 고시 의도와 다르게 적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고시 개정에 나선 배경이다. 개정 고시는 주당 평균 업무시간이 60시간을 넘으면 개인 질병이 원인이라는 증거가 없는 한 업무상질병으로 인정한다. 발병 전 12주 동안 주당 평균 노동시간이 60시간이 안 될 경우 ‘업무부담 가중요인’이 있으면 업무 관련성을 인정하도록 했다. 과로 산재에 대한 노동자의 입증책임을 완화하겠다는 취지다. 야간근무 업무시간을 산출할 때 주간근무보다 30%를 가산하게 한 것은 우리나라가 최초다.

일각에서 ‘주당 60시간’ 기준에 문제를 제기하는 의견도 있는데, 주당 60시간은 의학적인 산출기준이다. 그 시간이 넘어가면 질병이 발생한다는 의학기준이지, 근로기준법을 기준으로 삼은 게 아니다. 다만 여러 지적에는 공감하고 있다. 뇌심혈관계질환·근골격계질환·직업성암·정신질환 등 4개 업무상질병은 매년 2개씩 2년 단위로 고시 기준이나 판정지침의 타당성을 검토해 수정·보완하고 있는 만큼 지적된 부분에 대해 연구해 나가면서 개선하고 보완해 나가겠다. 올해는 개정된 고시가 현장에 안착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현행 고시라면 인정될 산재 불승인 사건 구제조치해야
권동희 공인노무사(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권동희 공인노무사(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개정 뇌심혈관질환 산재 인정기준 고시가 과거 고시에 비해 진일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정 고시는 2012년 전문가들이 논의해 마련한 합의안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에도 의학적 연구 결과와 법원 판단이 충분히 있었다. 뇌심혈관질환의 특징상 산재 불승인은 노동자와 그 가족을 불행으로 떨어뜨린다. 근로복지공단 자료를 보더라도 업무시간이 주당 64시간 이상인 경우에도 산재 승인율은 70%에 불과했다. 1주 평균 52시간 이상인 경우에도 업무시간이 부족하다거나, 기존 질환이 있다거나, 업무강도가 약하다는 점을 들어 상당수가 산재로 인정되지 못했다. 이렇게 매년 1천500명 정도의 뇌심혈관질환 사건이 불승인돼 왔다.

그중에는 현행 고시 수준이면 산재로 인정될 여지가 있는 사건도 많다. 지금이라도 이들에 대한 구제조치를 해야 한다. 그리고 야간노동의 30% 가중요인에 감시·단속업무 노동자를 배제한 점, 업무 가중요인에서 고온작업을 삭제한 점, 출장업무와 육체적 노동강도 범위가 좁은 점 등은 문제다. 무엇보다 법원은 업무상 과로와 스트레스를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점을 비춰 볼 때 고시와 근로복지공단 뇌혈관질병·심장질병 업무상질병 조사 및 판정지침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면밀히 반영하지 못하는 기형적 구조를 만들고 있다.

현행 만성과로 노동시간 기준 과학적·의학적 근거 없다
조기홍 한국노총 산업안전보건연구소 소장

조기홍 한국노총 산업안전보건연구소 소장

지난해 노동부는 뇌심혈관질병 산재 인정기준 고시를 개정했다. 노동시간 외에 업무 수행과 관련한 평가가 확대됐고 야간근무의 경우 30%를 가산해 업무시간을 산출하는 등 과거에 비해 인정기준을 확대했다. 향후 개정된 고시 기준 적용으로 노동자의 뇌심혈관질병 업무상질병 인정이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 고시 개정은 고식지계(姑息之計)에 불과하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로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을 비롯해 고용불안과 각종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뇌심혈관계질환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정당한 보상을 받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정부는 과학적·의학적 근거가 없는 1주 평균 60시간 만성과로 기준을 즉각 폐기하고 1주 평균 52시간으로 기준을 바꿔야 한다. 또한 야간근무에서 제외한 감시·단속 업무를 포함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뇌심혈관계질환 인정 범위를 전향적으로 확대하는 것도 필요하다. 노동자는 로봇이나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인간이다. 노동자 개개인이 건강상 위험(노동강도·스트레스 등)을 받아들이는 정도에 차이가 있고 이로 인해 질병이 발생할 상황도 다양하다. 정부가 획일적인 잣대로 노동자의 업무상질병을 판단해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는 노동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노동자 사이 형평성 문제 제기될 수밖에 없어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

인정기준 고시 개정에서 기존질환을 이유로 불승인을 남발하게 했던 문구가 삭제되거나 야간근로에는 노동시간을 할증하도록 한 것은 긍정적 요소다. 그러나 핵심 조항인 만성과로 기준을 주당 60시간 이상 일한 경우로 유지한 상태에서 주당 52시간 기준을 부분적으로만 도입한 것은 여전히 한계다. 공무원 등에 적용되는 공무상 재해 인정기준은 주당 52.5시간이다. 또다시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그동안 뇌심혈관질환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업종이면서도 불승인이 남발됐던 경비 등 감시·단속업무를 야간근로 할증에서 제외하고 있다. 지침을 통해 업무나 별도 수면장소 여부를 구분한다고는 하지만 고시에서 제외하고 있는 상태여서 현장의 혼란이나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심의에서 실효를 기대하기 어렵다. 노동시간을 할증하는 야간근무를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로 정하고 있으나, 이는 야간근로에 대한 특수건강검진 도입 당시에 문제가 돼 개정된 바 있다. 병원 사업장 등 상당수 사업장에서 업무를 밤 9시에 시작하거나, 혹은 다음날 오전 7시에 퇴근하는 등 근무시간대가 불규칙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보완이 필요하다. 아울러 불승인이 남발된 대표 직종인 택시노동자의 대기시간 문제나 업무 부담 가중요인, 정신적 긴장도가 높은 업무 등에 대한 세부내용이 근로복지공단 조사 및 판정 지침으로 넘겨졌다. 그러나 현실에서 뇌심혈관질환의 현장재해조사 비율은 40%를 밑돌고 있어, 개정된 기준이나 지침의 실질화를 위한 대책이 제시돼야 한다.

협의 없는 일방적 제도개선, 절차적 문제 있다
임우택 경총 안전보건본부장

임우택 경총 안전보건본부장

2018년 1월1일부터 시행 중인 뇌심혈관질환 인정기준은 산업계의 문제제기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논의 없이 정부안으로 신속하게 개정됐다. 노사정 및 전문가의 다양한 검토와 협의를 거쳐 업무상질병 인정기준을 개정했던 과거와 비교할 때 사회적 합의 없이 정부 일방으로 제도개선을 추진한 것은 절차적으로 문제가 있다. 또한 1주 평균 52시간 개념을 도입했는데, 특정 근로시간과 질환 발병과의 연관성이 과학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음에도 이를 인정기준에 무리하게 적용했다. 업무부담 가중요인도 근로시간 기준과 결부시켜 업무관련성이 강하다고 평가하도록 했는데, 이는 뇌심혈관질환을 업무상재해로 인정하고 있는 일본·대만의 입법례에도 존재하지 않는 방식이다. 야간근로의 근무시간 산출방법도 주간근로보다 30%를 가산하도록 했는데 정부는 가산근거에 대한 어떠한 합리적·의학적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특히 근로자의 건강상태(기초질환)가 질환발병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음에도 이를 고려대상에서 삭제한 것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개정 전 고시는 근로시간과 업무강도, 건강상태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업무상재해 여부를 판정하도록 했다. 그에 반해 개정 고시는 근로시간 초과만으로 산재승인이 가능해졌다. 합리성을 확보하지 못한 인정기준의 성급한 시행은 업무상재해 인정 여부를 둘러싼 또 다른 논란만을 야기할 뿐이다. 이미 시행 중인 인정기준을 재개정하는 논의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근로시간 초과 여부가 뇌심혈관질환 인정의 절대적 기준이 되지 않도록 업무상질병 판정지침을 합리적으로 마련·운영하는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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