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경 공인노무사(돌꽃노동법률사무소)

"웅~. 웅~."

오늘 아침도 알람시계 대신 채팅방 SNS 톡 알림 소리에 잠을 깹니다. 간밤에도 300건이 넘는 대화가 오갔네요. 직장갑질119 채팅방에서 대화를 주고받았던 ‘을’님들께 이렇게 편지를 띄우려니 새삼 많은 생각이 교차합니다.

처음 채팅방을 찾아 주신 날, 다양한 닉네임의 을님들은 인사 대신 “이런 것도 갑질에 해당하나요?” 하는 질문을 건네셨죠. 혹은 “급한 일인데 도와 달라”는 요청도 하셨어요. 수줍고 조심스러운 첫마디였지만, 그 다음에 이어진 사연들은 대부분 두 눈을 의심하게 하는 경악할 만한 제보들이었어요. ‘갑질’이라는 말이 너무 과분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수많은 직장에서 끔찍한 불법행위와 괴롭힘, 성희롱과 폭력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난해 11월 이후 직장갑질119 오픈채팅방에서 인사를 건네고 상담을 해 드렸던 수많은 을님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회사에 바른 소리 몇 번 했다고 동료들에게 이상한 헛소문을 퍼뜨려 밥조차 같이 못 먹게 만든 그 상사는 여전히 인간이길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나요? 온갖 협박과 폭언을 일삼으면서 나갈 때까지 집요하게 괴롭히겠다는 사용자에 맞서 끝까지 버티겠다던 을님은 여전히 싸우고 계신지요? “우리 회사에는 원래 연차 같은 것 없다”는 사장 말이 법인 줄 알았던 또 다른 을님은 이제 마음 놓고 쉴 수 있게 되셨나요?

“성희롱을 당한 사람은 나인데 가해자는 아무 일 없는 듯 버젓이 회사를 다니고 나만 피해를 입는다”고 하셨던 을님, 새해 안부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파견이라서, 용역이라서, 계약직이라서, 특수고용 노동자라서, 무기계약직이라서 차별받고 있다”던 무수한 을님들의 한숨이 더 깊어지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직장갑질119 스태프로 참여한 이후 자주 곱씹는 질문이 있습니다. ‘도대체 어쩌다가 대한민국 직장이 이렇게 처참한 지옥으로 변했을까?’

직장갑질119 채팅방을 찾아오신 을님들을 포함해 대다수 직장인들은 학교에서 노동법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노조할 권리가 헌법에 보장돼 있음을 알 리 없습니다. 실제 노동조합을 경험해 본 직장인들은 10%에도 못 미칩니다.

‘고용 유연화’라는 미명 아래 나쁜 일자리는 늘어났습니다. 우리 주변의 노동자 2명 중 1명은 비정규직입니다. 회사가 어렵다면 언제든 비정규직 몇 명쯤은 쉽게 사용하고 버리는 것이 당연시됐습니다. 성과에 의해 등급이 매겨지고, 임금이 차등화되고, 채용 형태에 따라 사회적 신분이 결정되는 구조에서 노동자들끼리 반목하고 자신만의 이익 챙기기가 심화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노동자의 존엄을 지키는 직장이란 이상일 뿐입니다. 이런 모순과 적폐들이 고스란히 축적돼 드러난 결과물이 ‘직장갑질119 속 세상’입니다.

첫출발 시점에서 “채팅방 참여자가 100명만 넘어도 좋겠다”던 바람은 얼마 전 채팅방 수용인원 한계를 돌파하면서 무색해졌습니다. 채팅방 참여인원 숫자가 1천명에 도달하는 순간 ‘곪다 못해 터져 버린 환부’ 이미지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어요.

지난 3개월, 채팅방에서 많은 을님들은 시급한 궁금증을 해소하고 퇴장하셨습니다. 그리고 회사 사과를 받고, 법적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을 보면서 스태프들도 함께 안도하고 기뻐했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오늘도 무수한 을님들이 나간 빈자리는 또 다른 을님들, 혹은 ‘병’ ‘정’님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채팅방을 보며 생각합니다.

직장을 다니며 상사의 무시와 멸시로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을님의 상처는 잘 아물 수 있을까. 퇴사를 하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해 전쟁을 치러야 했던 을님의 또 다른 직장에서의 새 삶은 평온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제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제 곧 오픈 100일을 맞이하는 직장갑질119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갑질 반사’를 위한 거창한 묘안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직장의 변화는 채팅방을 찾아 주신 을님들로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서도 출근을 두려워하는 많은 직장인들, 사용종속관계 속에서 하루하루 불합리함을 견디며 월급날을 기다리는 을님들, 그중 대다수는 침묵합니다. 용기 내기가 두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직장갑질119에 접속해 주신 을님들은 평범하지만 남다릅니다. ‘갑질119’를 검색하고, 닉네임을 고민하고, 채팅방에 들어와 심호흡 한 번 하고 첫인사를 건네기까지, 그것은 칠흑같이 어두운 직장생활에 ‘탁’ 하고 불이 켜지는 과정 아니었을까요.

부디 올해는 그런 을님들의 주변이 조금씩 환해질 수 있기를 응원하고 기원합니다. 곧 다시 채팅방에서 인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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