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호 한국노총 교육선전본부 실장

최근 <회색인간> 등 한꺼번에 세 권의 소설책을 낸 김동식 작가는 주물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김 작가 소설 가운데 <인간 평점의 세상>이라는 작품이 있다.

별의별 소재를 가지고 랭킹을 매기는 인간들에게 악마는 저주를 내린다. 사람들이 죽을 때마다 그의 머리 위에 커다란 숫자를 띄우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 평점’이었다.

평점은 영정사진 위에도 보였다. 이로 인해 장례식장 풍경이 바뀌었다. 높은 점수가 나온 집은 자랑스럽게 사진을 공개했지만, 사진 없이 장례식을 치르는 집도 있었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슬픔 이외의 감정을 느끼게 됐다. 장례식장을 다녀온 사람들은 그 사람의 평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인간 평점은 과연 소설 속 상상일 뿐인가, 라는 생각을 소설을 읽으면서 떠올린다. 정부는 노동의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를 지향한다고 밝히고 있지만, 과연 우리 사회에서 ‘모든’ 노동은 동일하게 그 가치를 존중받고 있을까. 각자의 노동은 평점을 통해 귀하고 천함으로 나뉘지는 않는가.

지난해 한 국회의원의 발언을 상기해 보자. “조리사라는 게 별것 아니다. 그냥 급식소에서 밥하는 아줌마다. 정규직화를 해야 할 이유가 없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 발언에 분개했다.

그렇다면 새해 벽두부터 화두가 되고 있는 최저임금 논쟁에 대해서도 우리는 똑같이 분노하고 있을까. 이른바 1천60원의 구조조정이 벌어지면서 최저임금은 국가경제를 위태롭게 하는 ‘근원’으로까지 몰리고 있다.

평당 6천만원 넘는 아파트 주민들은 한 가구당 4천500원을 분담하는 게 부담돼 94명의 가장을 새해 첫날 거리로 내몰았다. 대학들은 환경미화 노동자들을 구조조정하면서 단기 아르바이트생으로 그 자리를 채웠다.

상황이 이러하니 보수야당들과 언론들은 연일 최저임금 문제점을 떠들고 있다. 지난해 대통령선거 당시 유승민 후보(2020년까지)와 홍준표·안철수 후보(2022년까지)는 모두 최저임금 1만원을 약속했다. 자유한국당과 국민의당 공약대로라면 올해 최저임금은 대략 7천100원 정도로 책정됐어야 한다.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사용자들이 마지막으로 제시한 안은 7천300원이었다. 올해 최저임금(7천530원)과 불과 300~500원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물론 이들은 이미 자신들의 주장은 머릿속에서 지웠다. 한 발 더 나아가 “공약을 지키면 나라가 망한다”는, 인간의 얼굴을 하고서는 할 수 없는 부끄러운 말을 내뱉고 있다. 보수언론들은 최저임금 때문에 물가가 오르고, 고용은 줄어들었다며 최저임금 인상에 저주를 쏟아붓고 있다. 높은 임대료와 재벌의 갑질에 대해서는 입을 닫는다.

도대체 이들의 ‘최저 인식’에 평점을 어떻게 매겨야 하는 것인가. 소설 속 악마의 저주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죽음 뒤의 평점을 두려워해서 평소 행실을 조심하면서 오히려 모범적인 쪽으로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악마는 인류에게 걸었던 저주를 바꾼다. 바뀐 저주는 죽을 때 평가를 받는 대신, 태어날 때 평점을 주는 것이다. 아기들은 태어나면서 10점, 5점, 1점 이렇게 점수를 받고 살아간다. 어허, 이것은 현실의 금수저·흙수저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소설 속 저주의 세상에 살고 있다. 현실은 소설보다 더 오싹하고 끔찍하다.

한국노총 교육선전본부 실장 (labor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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