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호

지방으로 다니다 보면 크고 넓적한 화강암에 “바르게 살자”라는 구호가 새겨져 있는 입석이 도로변에 설치돼 있는 것을 가끔 본다. 군사독재 시절 정권에서 아래로 시켜서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말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아무렴 사람이라면 사람답게 바르게 살아야 하고 말고. 그러나 그 “바르게 살자”라는 말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사람이 사람답게 바르게 살라는 게 아니라 국가가 시키는 바를 바르다고 믿고 무조건 열심히 따르라는 것이다. 당시 그 구호는 '충효'라는 말과 동시에 널리 전파됐는데, 충효를 강조한 것은 박정희·전두환 일당의 식민지 파쇼통치를 봉건시대에 왕의 통치를 따르듯이 무조건 충성스럽게 따르라는 말이었다. 봉건시대 충효는 또 부모에게 효도하듯이 국왕에게 충성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참으로 바르게 살고자 하면 남에게 무조건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해 바르게 알고 그 아는 바에 따라야 할 것이다. 제일 먼저 사물, 구체적으로는 사회의 연관관계나 인과관계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파악해야 한다. 이것이 바르게 살기 위한 첫 번째 전제조건이다. 그와 동시에 사람이 추구하고 지향해야 할 가치관계를 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또 하나의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후자는 전자의 전제조건, 즉 사회에 대한 연관관계나 인과관계를 바르게 아는 것을 기초로 한다. 전자를 연구하는 것이 사회과학이다. 후자를 연구하는 것은 인문학이다. 이런 사회과학과 인문학에 대한 학습과 탐구 없이 무조건 바르게 살자고 교양하는 것은 다름 아닌 지배 이데올로기 주입이다.

우리는 지금도 군사독재 시절이나 마찬가지로 지배 이데올로기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스스로 매우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한 꺼풀 벗겨 보면 죄다 지배 이데올로기의 복창인 경우가 많다. 우리가 흔히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현존 자본주의 계급사회에서 또는 식민지 파쇼통치 아래서 통용되는 지식이나 지혜에 지나지 않는다. 건전한 양식이라고 하는 것들로 마찬가지다. 건전하다는 것은 자본주의 계급사회나 식민지 파쇼통치에 위해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생산수단 사적소유는 자본주의에서 상식이다. 그러나 그 상식은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통용되는 상식이다. 상품생산은 자본주의에서는 상식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생산양식 아래서만 통용되는 상식이다. 미 제국주의에 종속돼 살아가는 것은 식민지 파쇼통치 아래서는 상식이고, 그 질서에 위해를 가하지 않는 것이 건전한 양식이다. 이런 상식과 양식의 한계를 넘어서서 부단히 변화하는 역사 속에서 사물의 인과관계나 가치관계를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진짜로 똑똑한 사람이다.

사물을 바르게 파악하려면 무엇보다 바른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 독재를 민주라고 부르면서 정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강도를 의인(義人)이라고 부르면서 그 강도에 대해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너무나 사물과 부합하지 않는 명칭들이 무비판적으로 사용돼 왔다. 지금도 그렇게 무비판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진보적인 정치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파시스트들이 자신들의 지배질서를 자유민주주의라고 참칭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부르자면 이른바 수구세력은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아니라 예속 파시스트 세력이다. 진짜 자유민주주의 세력은 영화 <1987>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파쇼통치에 맞서 목숨을 바쳐 투쟁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노동자들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무조건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

자유민주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혼동과 비슷하게 우리를 혼동시키는 명칭들이 있다. 정치권이나 언론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정당을 진보정당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수구 파시스트 정당을 보수정당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바른 명칭을 붙이자면 더불어민주당 같은 자유민주주의 정당은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질서로 자리 잡은 사회에서는 보수정당이고 자유한국당 같은 파시스트 정당은 극우정당이고 수구정당이다. 이렇게 그들은 파시스트를 보수로 참칭하고 보수를 진보로 참칭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스스로를 조금 나아 보이게 포장하면서 진정한 진보세력이나 진보정당이 차지할 자리를 선점하고 있다. 노동당이 진보정당인가? 그렇다면 노동당과 더불어민주당은 이념적으로 같은 부류인가? 필자가 보기에 노동당은 우파 진보정당이다.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추구하고 있다. 사회주의 이념을 추구하면 좌파 진보정당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금년에는 잘못된 이름이 아니라 아예 제대로 된 바른 이름을 가지지 못한 채 70년째 고통이 이어져 온 문제가 있다.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피해 배(보)상 문제가 그것이다. 제주 4·3 평화공원에 가면 지하에 비문이 적혀 있지 않은 흰색 비석이 누워 있다. 바른 이름을 갖지 못한 채 여전히 4·3 사건이라는 무미건조한 이름을 갖고 있다. 광주사태가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정명(正名)을 가지게 됐듯이 제주 4·3사건에도 ‘제주민중항쟁’ 같은 바른 이름이 붙여지고 진상이 규명돼 누워 있는 백비(白碑)에 비문이 새겨지고 바로 서게 해야 할 것이다.

사물에 바른 이름을 붙여 부르는 문제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다. 그런 것에도 지배세력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작용한다. 우리 노동운동은 평소에 열심히 경제투쟁을 해 왔고 지난해에는 그것에 더해 정치투쟁도 열심히 했는데, 그런 맥락에서 금년에는 이데올로기 투쟁에 적극 나서야 할 것 같다. 헌법 개정이 의제가 되고 있는데, 이 문제는 정치투쟁의 문제인 동시에 이념투쟁의 문제다. 예컨대 자유민주주의 헌법이라면 공산주의·사회주의를 선전·선동할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 그래야 명실상부한 자유민주주의다. 새해에는 경제투쟁·정치투쟁과 더불어 사회주의를 주장할 수 있는 참다운 자유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투쟁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자.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seung742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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