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5월1일 발생한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크레인 사고 현장. <삼성중공업일반노조>

지난해 5월1일 노동절에 발생한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크레인 사고는 우리 사회에 충격을 줬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사고로 6명이 목숨을 잃었고, 25명이 다쳤다. 정부는 서둘러 타워크레인 중대재해 예방대책을 발표했다. 사고를 경험하거나 목격한 노동자 대상 트라우마 관리 계획을 밝혔다. 그런데 재해를 당한 지 8개월이 지났는데도 산업재해를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진아무개(55)씨가 그렇다. 그는 사고 당시 팔과 다리를 다쳤지만 물량팀 팀장이라는 이유로 산재를 인정받지 못했다. 사고 현장을 목격한 그는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다 자비를 들여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하청에 재하청으로 이어지는 다단계 구조 탓에 25명의 부상자 명단에 포함되지 못한 노동자들이 있다는 사실도 처음 확인됐다.

근로복지공단 “물량팀장은 사업주” 산재신청 기각

9일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경남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노동절에 발생한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크레인 충돌사고로 다친 노동자들이 재해를 당하고도 산재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아무개씨는 지난해 1월부터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하청업체 성지산업과 도장작업 공정노무(물량팀) 계약을 맺고 일을 시작했다.

도급계약서도 작성하지 않고 일하던 진씨는 크레인 사고로 팔다리를 다쳤다. 골리앗크레인과 부딪친 지브형 타워크레인이 진씨가 일하던 곳으로 낙하하며 진씨를 강타한 것이다. 바로 병원으로 실려 간 진씨는 다음날 어이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병문안을 온 줄 알았던 하청업체 관계자가 도급계약서를 사고 전날인 4월30일부로 만료된 것으로 작성한다며 서명을 요구하고 도장을 달라고 했다. 진씨는 내용도 확인하지 못한 채 요구를 들어줬다. 사고 발생 8개월이 넘었지만 진씨는 도급계약서를 보지 못했다. 도장도 돌려받지 못했다. 하청업체 성지산업은 지난해 6월 말 폐업했다.

그날 사고 부상자 25명 중 한 명인 진씨는 거제 백병원에서 11일간 치료를 받았지만 하청업체나 삼성중공업에서 치료비를 받거나 산재신청과 관련한 설명을 들은 적이 없다. 하청업체에 산재 신청을 문의했지만 사업주라는 이유로 “산재신청이 불가하다”는 말만 들었다. 결국 진씨는 지난해 6월 홀로 근로복지공단 통영지사에 산재를 신청했지만 “대지플랜트(물량팀) 대표로서 노동자를 고용하고 소속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급했다”며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적용을 받는 노동자가 아니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물량팀이란 조선소 내 일감에 따라 작업장을 옮겨 다니며 일하는 팀이다. 다단계 하청구조의 맨 아래에 있는 노동자다.

부상자 명단에도 포함되지 않은 피해자도 있다. A하청업체에서 일하던 ㄱ씨는 사고 당일 크레인 와이어에 다리 부상을 입었으나 집안에 위중한 일이 생겨 급하게 다른 지역으로 가야 했다. ㄱ씨는 하청업체에 사고 부상자로 보고를 했지만 치료와 관련한 아무런 조치도 받지 못했다. ㄱ씨는 자비로 치료비를 충당하고 있다.

"계단에서 구르고 사고 당하는 꿈 시달려"

정부는 지난해 11월부터 붕괴·협착·절단 같은 충격적인 재해를 경험하거나 목격한 노동자를 대상으로 트라우마 관리프로그램을 전국에서 실시하고 있다. 그런데 거제조선소에서 6명의 동료가 목숨을 잃는 상황을 지켜본 진씨와 ㄱ씨는 어떤 지원도 받지 못했다.

진씨는 “사고 이후 잠을 제대로 못 잔다”며 “계단에서 구르고 계속 사고를 당하는 꿈을 꾼다”고 전했다. 그는 “퇴원 직후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사고 현장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며 “크레인이 낙하하며 끊어진 와이어가 사방으로 튀어오르던 광경이 자꾸 떠올랐다”고 말했다. 진씨는 지금도 정신과치료를 받고 있다.

진씨는 “지난해 10월께 삼성중공업에서 자체 심리상담을 한다며 증상을 물어봤다”며 “그러나 그 통화 이후 어떠한 추가 연락도 받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진씨는 결국 지역노조의 도움을 받아 지난 8일 근로복지공단 통영지사에 다시 산재를 신청했다.

진씨의 산재신청을 대리한 김태형 변호사(법무법인 믿음)는 “진씨는 하청업체에서 매일 수시로 업무지시를 받았고, 업무 진행상황을 보고했을 뿐만 아니라 급여일마다 실제 자신이 수행한 근로제공에 따른 급여를 받았다”며 “자신의 판단에 따라 업무수행을 할 수 없었고 하청업체에서 구체적·개별적인 지휘·감독을 받아 왔기에 진씨는 임금을 목적으로 하청업체에 전속돼 근로를 제공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은주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활동가는 “진씨는 하청업체의 지휘·감독을 받아 온 노동자로, 물량팀은 위장도급에 불과했다”며 “더군다나 도급계약 만료일을 사고 전날로 명시하며 사고 당일은 일용공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산재가 인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트라우마가 심각한 진씨와 ㄱ씨는 이제야 겨우 조선소가 아닌 곳에서 일용직으로 일을 시작했다”며 “사고 당시 현장에 100여명의 노동자가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들처럼 누락되거나 은폐된 피해자는 더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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