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욱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법무법인 여는)

촛불혁명으로 탄생할 수 있었던 문재인 정부는 노동존중 사회를 내세우며 여러 노동정책을 제시했지만 현재 구체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최근 근로기준법 개정 논의 과정을 지켜보면 적어도 노동시간에 관해서는 역행하는 느낌마저 든다. 근로기준법 개악안과 이후 전망에 대한 세세한 논의는 이 지면에서 논외로 하더라도 그간 우리나라 판례와 노동현장 실태를 보면, 노동자의 시간(時間)은 기본적으로 사용자의 처분권에 속하는 것으로 전제하는 관점이 깔려 있었다. 쉽게 말해 임금만 제대로 지급하면(많은 경우에 있어 이마저도 잘 안 지키지만) 노동자는 시키는 대로 일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 판례의 태도였고 노동현장의 모습이었다.

근로기준법은 법정 근로시간을 규정하고 이를 상회하는 근로를 위해서는 사용자와 노동자 양 ‘당사자 간의 합의’ 및 ‘근로자의 동의’를 요한다. 그런데 대법원 판결(94다19228)은 “개별 근로자와의 연장근로에 관한 합의는 연장근로를 할 때마다 그때그때 할 필요는 없고 근로계약 등으로 미리 이를 약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할 것이고, 이 약정은 기간의 정함이 없는 것으로서 근로계약을 해지하지 않은 이상 연장근로에 대한 합의의 효력은 그대로 유지된다”고 하여 동의할 때 동의 대상이 특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미리 동의' 하는 것도 가능하고, 한 번 동의하면 기한의 정함이 없이 연장근로에 동의한 것으로 사실상 간주해 버리고 말았다. 이에 따르면 근로관계가 종료되기 전까지는 사용자가 시키는 연장근로를 계속해야 한다는 결론이 된다. 결국 위 대법원 판결은 원고가 피고의 연장근로에 대한 지시를 거부할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없다고 하여 징계(해고) 사유를 인정하고 있다. 또한 대법원 판결(91도600)은 연장근로 동의에 대해 “연장근로가 당사자 합의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근로자들을 선동해 근로자들이 통상적으로 해 오던 연장근로를 집단적으로 거부하도록 함으로써 회사 업무의 정상운영을 저해했다면 이는 쟁의행위로 봐야 한다”고 하여 대법원 판결 사안의 당사자들이 형사처벌되거나 정당한 징계(해고)로 인정됐다. 분명히 근로기준법에 '동의' 혹은 '합의'라고 명시돼 있고, 노동자는 그에 대해 합의를 해 준 일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아주 미약한 근거를 들어 “당신은 이미 합의했고, 노동시간에 관한 당신의 권리는 포기가 된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판결 태도는 경영권·징계권에 대한 '합의'를 매우 제한적으로만 인정하고 있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대법원이 소위 경영상 결단이나 정리해고에 대한 합의를 '협의'가 아니라 '합의'로 보고 그 효력을 인정한 것은 최근인 2012~2014년 무렵의 일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사정 변경을 통해 배제할 수 있도록 해석하고 있다. 애당초 사용자 권리라고 보기도 어려운 경영권이나 정리해고 등에 대한 제한 합의는 이토록 제한적으로 인정하면서도, 노동자의 명시적인 권리이자 삶 그 자체이기도 한 노동시간 합의는 매우 폭넓게 해석하고 있다.

위와 같이 노동시간에 대해 대법원이 노동자 동의를 폭넓게 인정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법정 근로시간 규제장치를 거의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는 근로계약이 기본적으로 노동력의 제공(=소정 근로시간 안에서의 노동력 제공)과 임금의 교환(交換) 관계(쌍무계약)에 있다는 점을 무시하고, 노동자가 사용자에게 마치 전인격적이고, 상시적으로 종속(從屬)돼 있는 존재(즉 노비)라는 전근대적인 관점에 기초하고 있다. 노동시간에 대한 통제는 노동자의 삶과 건강 그 자체와 직결된 것(즉 인격권 내지 건강권적인 관점)으로서 단지 그에 대한 임금만 제대로 지급받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국회의 근로기준법 개악 논의는 시급히 그 전제가 바뀌어야 하고 노동시간 '합의'에 대한 대법원 판결의 대폭적인 변경이 필요하다. 올해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한국이 노동시간 2~3위라는 통계에서 벗어나는 원년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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