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지난 7일 저녁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가면무도회였다. 화려한 문양과 색으로 반짝이는 가면 대신 노란 종이봉투로 만든 가면을 쓰고 사람들이 모였다. '쿵쾅쿵쾅' 비트에 춤을 추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섞여 속내를 털어놓았다. 자신을 보호할 거라고는 종이 쪼가리 하나뿐인 사람들이 아픔을 토로하고 위로를 주고받았다.

이날 행사는 직장갑질119라는 단체에서 기획했다. 야한 옷을 입고 장기자랑을 하라는 강요를 받은 간호사들 얘기로 논란이 된 한림대 성심병원 문제를 제기한 단체다. 노동자들의 용기 있는 폭로 덕에 '직장갑질'은 올해 하반기 한국 사회 화두가 됐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14일 오후 서울 중구 민주노총 소회의실에서 직장갑질119 스태프와 집담회를 갖고 그간 활동과 과제·방향을 들었다. 오진호 총괄스태프(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집행위원), 김유경 스태프(공인노무사·돌꽃노동법률사무소), 정현철 스태프(사무금융노조 미조직비정규국장)가 참석했다. 연윤정 매일노동뉴스 부국장이 사회를 봤다. 직장갑질119에는 민주노총 법률원·노동인권실현을 위한 노무사모임·비없세·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알바노조·사무금융노조 등에서 나온 241명이 스태프로 참여하고 있다.

“촛불시민, 직장내 민주주의는 어떻게 해결하지?”
노동·시민·법률단체 스태프들 오픈채팅 상담 분담


사회 : 직장갑질119 출범 배경이 궁금하다. 처음 누가 아이디어를 낸 건가.

오진호 : 올해 초 촛불이 모인 서울 광화문광장 캠핑촌에서 머물렀다. 어느 토요일 저녁 사람들이 추위를 뚫고 지하도에서 올라오는 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들은 거리에서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염원하는데, 그렇다면 직장내 민주주의는 어떻게 해결할까? 그 고민을 안고 올해 3월부터 비없세에서 토론을 시작하고 많은 단체 활동가들을 만났다. 결국 ‘직장갑질’이란 키워드를 갖고 문제를 제기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고민을 더해 젊은 사람들이 많이 하는 SNS를 기반으로 캠페인을 하기로 했다.

정현철 : 비없세에서 공개 워크숍을 한다고 웹자보가 떴더라. 사무금융노조에서 미조직비정규 담당을 하면서 조직화 방식을 고민하던 때였다. 금융산업 외곽 사람들을 현실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공간, 그를 통해 조직화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이거다 싶었다. 내 고민과 맞아떨어졌다.

김유경 : 노노모 회장인 박성우 노무사에게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이런 플랫폼이 생겼고 노무사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새로웠다. 그동안 내가 접한 사업장은 노조가 있는 곳이었다. 노조에 조직되지 않은 새로운 공간이라는 점에서 참여하고 싶었다. 오픈채팅방에 들어가 보고 놀랐다. 생각보다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사회 : 누가 참여하고 있고, 역할은 어떻게 분담하나.

오진호 : 241명 중 27명이 노동스태프, 나머지 214명은 법률스태프다. 노동스태프는 노동·시민단체 활동가, 법률스태프는 변호사·노무사로 구성돼 있다. 오픈채팅(gabjil119.com)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하루 12시간 동안 3시간씩 4개 타임으로 나눠 진행한다. 1주일에 24명이 상담을 맡는다. 노노모에서 이메일 상담을 접수해 권두섭 변호사와 박성우 노무사가 검토한 뒤 스태프들에게 넘기면 나눠서 답변이 이뤄진다. 이메일 상담 참여 스태프는 30명 정도 된다. 문화·출판사업을 고민하는 스태프도 있다.

사회 : 다양한 노동문제 중에서 직장갑질에 주목한 이유는 뭔가.

정현철 : 직장갑질은 모든 노동문제가 응축돼 나타난다. 갑질은 주로 사용자·상사·동료·남성에 의해 이뤄지고, 과로노동·임금체불·폭언·폭행·성희롱처럼 발현되는 형태도 다양하다. 이런 것들이 두세 개씩 묶여 나타난다. 직장에서 나타나는 각종 노동문제가 응축해 터지는 문제가 갑질이다. 세상이 바뀌고 정부가 바뀌었어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진호 : 직장갑질 사례를 보면 대부분 현행법 위반사항이 많다. 직장내 괴롭힘이나 인권침해처럼 이런 문제를 지칭하는 다른 용어도 있다. 하지만 이 말들은 "근로기준법 몇 조 위반"이라고 할 때처럼 직장인들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노조할 권리라고 해도 노조할 엄두도 못 내는 사람에게는 자기 언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더라. 때마침 공관병 사태가 터졌다. 그걸 사회에서는 갑질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직장인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키워드를 갑질이라고 봤다.

오픈채팅방 수줍은 첫 질문 “이것도 갑질인가요?”
신혼여행 연차 못 쓰고 사장 턱받이 해 주는 직장인들


사회 : 직장갑질119 사업방식이 기존 조직과 달라 보인다.

김유경 : 오픈채팅방에서 보니 첫 질문이 수줍게 “이런 것도 갑질인가요?”로 시작하더라. 평소에 갑질인지도 모르고 당연한 것이라 여긴 것이다. 상하관계·위계질서에서 당하고 살다가 직장갑질119 문제제기로 점화되니 너도나도 비슷한 경험을 토로했다. 소름이 끼쳤다. 너무 많은 직장인들이 이렇게 살았구나 생각하니까.

정현철 : 개인적으로 자괴감이 들었다. 나도 햇수로 15년 노조에서 활동했다. 그런데 듣도 보도 못한 사례가 쏟아졌다. 노조가 직장내 문제에 생각보다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걸 봤다. 내가 15년간 뭘 했나. 슬펐다. 한편으로는 직장인들이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어떻게 살았나 생각하니까 화가 나기도 했다.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출범 뒤 한 달간 오픈채팅방 참여자가 5천여명이나 됐다. 오픈채팅방 갑질 제보는 1천330건, 이메일 제보는 676건을 기록했다. 어떤 사례가 있었을까.

김유경 : 연장근로가 너무 심각했던 사례가 기억난다. 그는 5명이 할 일을 혼자했지만 회사에서는 알아 주지도 않고 연장근로수당도 받지 못했다. 업무가 너무 많아 우울증 진단까지 받았다. 우리 사회에서 과로 사례는 여러 번 이슈화됐지만 이 사람 사례는 너무 심각했다.

꽤 유명한 학습지교사도 이메일로 상담을 요청했다. 지국장 횡포와 희한한 구조의 영업방식으로 빚더미에 올라앉았다는 내용이었다. 시원스레 답을 주기가 어려웠다. 하소연하면서 위안받지만 사실상 해결이 어려운 문제가 많다.

정현철 : 나도 생각나는 상담사례가 있다. 어떤 분이 상담하러 들어와서는 “나는 잽도 안 되는군요” 하면서, 자신은 사장이 밥 먹을 때 턱받이도 해 준다고 몇 마디 하고는 사라졌다. 정말 임팩트 있었다. 사장이 왜 턱받이를 하라고 했는지를 못 들었다.

김유경 : 이런 사례도 있다. 다음달 신혼여행인데 회사에서 연차를 안 줘서 못 간다는 내용이었다. 연차가 남았지만 회사는 남은 연차가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내가 “법적으로 휴가가 남았다”며 “사장과 이야기해서 행복한 신혼여행 다녀오라”고 충고했다. 그 뒤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 피드백되는 경우도 있지만 모르는 경우도 많다. 묻고 바로 나가는 경우도 많다.

한림대 성심병원 사례 군대식 직장문화 변화 계기되길
“직장갑질119 관심 폭발 노동부 불신에서 비롯” 


사회 : 한림대 성심병원의 선정적 장기자랑은 직장갑질119를 부각시킨 대표적 사례였다. 다른 병원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고발됐다. 분위기 좀 전해 달라.

오진호 : 지난달 2일 오픈채팅방에 처음 제보가 들어왔다. 처음에는 강동성심병원 임금체불이 문제가 됐다가 다른 성심병원도 심각하다는 내용이 지속적으로 올라왔다. 다음날인 3일 오픈채팅방에 성심병원 사람들이 엄청 들어와서 “우리 병원에 이런 일이 있는데 잘못된 게 아니냐”고 물었다. 심각한 것 같아 집중제보를 받았다. 국회에도 이 문제를 알렸다. 이 과정에서 장기자랑 문제가 언론을 타면서 사회적 이슈가 됐다. 현재 근로감독 중이다.

김유경 : 굉장히 큰 성과다. 규모가 큰 직장에서는 장기자랑을 한다. 예전 초등학교에서 매스게임을 시켰는데 다들 그냥 했다. 우리는 집단문화에 익숙하다. 대기업에서는 장기자랑을 하면서 “회장님 사랑해요” 이런 것도 시킨다. 우리가 직장문화를 바꾸는 데 기여하길 바란다.

정현철 : 전형적인 권위주의·군대문화가 드러났다. 기업 규모가 클수록 심하다.

오진호 : 성심병원에서는 장기자랑이 없어진 것을 확인했다. 누군가 용기 내서 제보하고 이슈화되니까 흐름이 바뀌었다. 그게 중요하다. 이전에는 대부분 더럽고 치사해도 장기자랑을 하고 넘어갔다. 이번에 성심병원에서 그냥 못 넘어간다는 것을 보여 줬다.

사회 : 들어온 제보는 어떻게 처리하나.

오진호 : 노동부·국가인권위원회·공정거래위원회에 제보할 것과 언론을 통해 여론화할 것, 노조로 상담할 것으로 분류한다. 노동부에 근로감독을 요청해 현재 감독이 진행 중이거나 예정인 곳이 있다. 노조로는 개별적으로 연결해 가입하는 경우가 많다. 이 밖에 자체적으로 해결되는 경우도 있다. 직장갑질119에 상담을 받았다고 하니 사장이 체불임금을 주고, 자기를 괴롭힌 부사장이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다는 사연이 있다.

사회 : 직장갑질119 오픈채팅방 참여자 대상 설문조사에서 77.4%는 노동부 신고가 도움이 되지 않거나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응답했다. 어떻게 보나.

김유경 : 근로감독관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근로감독관 스스로 바뀌고 긴장해야 한다. 개선하다 보면 불신감도 줄어들지 않을까.

오진호 : 직장갑질119가 왜 폭발적인 관심을 받을까. 우리가 하는 일은 노동부가 할 역할과 다르지 않다. 직장인이 불합리한 일을 겪으면 근로감독관을 찾는다. 노동부가 행정력을 발동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노동부가 제 역할을 해서 직장인들이 기댈 수 있는 공간이 돼야 한다.

정기훈 기자

한림대성심병원 노조 만들고 직종별모임 속속 결성
“오픈채팅방만 만든다고 조직화되는 게 아냐”


사회 : 직장갑질119는 오픈채팅방에 유입된 직장인을 직종별모임으로 연결해 주고 있다. 진행상황은 어떤가.

오진호 : 노동존중한림성심병원모임·병원간호사직원노동존중모임·보육교사모임이 밴드 형태로 직종별모임을 이루고 있다. 방송사비정규직이 카톡방으로 모임을 준비 중이다. 또 공단지역 제조업 노동자 대상 권리모임을 만들 생각이다. 이달 1일에는 강남·동탄·한강·한림(평촌) 등 4개 성심병원 노동자들이 모여 보건의료노조 한림대의료원지부를 출범했다.

사회 : 직장갑질119에 한계도 있을 것 같은데. 고민이 있다면.

김유경 : 직종별모임의 경우 만들어지는 순간 인력이 투입돼야 한다. 직장갑질119 스태프들이 시간을 내서 참여해야 하는데 어느 정도 수위까지 커버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된다. 개인적 업무가 있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공익모임이다 보니 플랫폼 업무가 늘어나면 어느 순간 물리적 한계에 부딪칠 수 있다. 또 하나는 이 플랫폼에 신선함이 있는데, 언제까지 신선함이 유지가 될 거냐는 거다. 어느 순간엔 진부해질 수 있다. 어떻게 신선함을 유지·진화시킬 것인가도 과제일 듯하다.

정현철 : 기존 노조가 일을 잘 못했기 때문에 직장갑질119가 출범했다. 집단화된 노조활동이 개별적·파편화된 사람들을 모아 내지 못했다. 조직사업에 한계가 노출된 것이다. 그 빈 공간을 채우고자 나온 게 직장갑질119다. 예컨대 민주노총이 자극받고 조직사업을 일대 전환해야 한다. 농담 삼아 이런 말도 있다. 민주노총이 들어오는 순간 엄청 경직될 거라고, 화석이 될 것이라고. 그게 민주노총의 현주소다.

오진호 :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가 히트를 쳤다. 무수한 아류 희망버스가 있었다. 형식을 갖다 쓰는 정도였던 것 같다.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는 소통과 공감이 키워드였다. 그런데 이 키워드가 빠졌다. 직장갑질119는 노동운동에서 신선한 방식임이 틀림없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소통하고 공감하려고 반발자국 나아가야 한다. 많은 조직이 오픈채팅방을 고민하고 있을 테지만 그것을 만든다고 일이 되지 않는다. 그 안에 담길 지향점이 명확해야 한다. 직장인에게 ‘우리가 들어줄게요’라고 질문을 던지고 문을 열어 줘야 한다. 그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것이 성공 포인트다.

“직장인들과 소통·공감하는 게 포인트”
기존 노조에 던지는 메시지 “문턱을 낮춰라”


사회 : 직장갑질119는 언제까지 지속될까. 여러분의 생각은.

김유경 : 시너지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많은 노동운동 경험자와 활동가들이 직장갑질119에 모여 새로운 방식의 운동을 하고 있다.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은 신나게 일하고 있다. 이런 에너지를 가지고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기대감이 크다. 막연함이 아니라 실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현철 : 노조의 문턱이 한없이 낮아져야 한다. 직장갑질119가 하나의 중요한 매개체로서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오픈채팅방에서 노조에 가입하고 싶은데 소개해 줄 데가 있냐고 묻는 경우가 있다. 묘하게 소개해 줄 데가 없더라. 노동자 개인의 노조가입 운동방식이 아니라 집단으로 묶인 노조가입 방식 때문이다. 지역마다 일반노조가 있긴 하지만 막상 연결해 주기가 쉽지 않다. 개별가입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오진호 :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지다 보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고공에 올라간 사람들의 눈물 나는 투쟁을 지원하고 노조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 많은 것을 해 볼 수 있겠다 싶다. 그것이 뭘까 고민하고 있다.


글=연윤정 기자
사진=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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