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인 가족이 가족회의에서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다. 양복을 입은 아버지가 지친 표정으로 “긴 출장과 야근으로 감기몸살이 떨어지지 않네”라고 말한다. 평상복을 입고 다림질을 하던 어머니는 “퇴근하고 집안일까지 내가 다 해야 하니까 너무 힘들어”라고 토로한다. 딸은 "엄마가 힘드신지는 알았지만 집안일을 분담하지 않았다"고 미안해한다.

중학교 1학년 기술·가정교과서에 실린 장면이다. 최근 초등학교 교과서에 성역할 고정관념이 담겨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 데 이어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도 같은 문제점이 드러났다.

13일 전교조 여성위원회(위원장 김성애) 소속 교사들로 구성된 페미니즘 교육연구팀 중등성평등연구소모임은 내년부터 사용될 중학교 1학년 교과서를 분석한 결과 8개 과목 교과서에서 성역할 고정관념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국어·사회·영어·수학·정보·과학·도덕, 기술·가정 교과서를 분석했다.

“남성은 말·공룡 타고, 여자는 독서·발레 하고”

성역할 고정관념은 교과서 삽화·본문·이미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교과서 속 여성은 가정에서의 역할이 강조되고, 남성은 직업 주체나 대표자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국어교과서 '내다보고, 엮어 보기' 단원 본문과 삽화에서 아들의 간식을 챙기는 인물은 어머니로 설정됐다. 또 다른 삽화에서 유모차를 끌고 가는 사람은 여성이다. 사회교과서 ‘국제 하천 이용·해상 교통로를 둘러싼 갈등’을 설명하는 삽화에서 각 국가를 대표하는 인물 5명은 모두 남성이다.

남성·여성의 고착화된 이미지가 사용된 장면도 있었다. 과학 교과서에서 남학생은 장비를 들고 실험에 적극 나서는 반면 여학생은 두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빛이 들어오는 쪽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영어교과서에 사용된 삽화에서 축구선수는 남자로, 여자는 응원석에 있는 것으로 묘사됐다. 표지 삽화에는 남성은 공룡·말을 타고, 여성은 발레와 독서를 하고 있어 남성의 동적인 역할을 더 강조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기술·가정교과서에서 소명·전문가·책임의식을 나타내는 사진에는 모두 남성이 등장했다. 봉사·돌봄·인류애를 나타내는 사진에는 여학생만 보였다. 영어교과서에서 남성은 ‘strong, active'로, 여성은 'go shopping'으로 표현됐다.

삽화 속 남녀의 등장 빈도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전교조는 “교과서 삽화·사진 속 남성 등장비율이 여성 등장비율보다 30~50% 정도 높았다”고 설명했다.

“교육부에 성평등 전담부서 설치 시급”

전교조는 “교과서에 성별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내용이 담긴 것은 교육부 성평등 교육정책 전반의 문제가 반영된 결과”라며 “교육부에 성평등 정책을 전담하는 부서를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육부에는 성 문제를 다루는 부서로 학생건강정책과·학교생활문화과 등이 있지만 역할이 제한적이라는 지적이다. 전교조는 "교육과정·교과서를 만드는 부서인 교육과정정책과·교과서정책과가 성 평등 관점이 반영되는 구조로 운영되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교육부는 지난 8일 직제개편을 입법예고하면서 민주시민교육과를 신설하고 부서의 21가지 업무 중 ‘초·중등학교 양성평등 교육 및 여성교육 정책 추진 총괄’을 배치했다. 하지만 전교조는 “정책집행부서 업무담당자 수준에서 성평등 교육에 관한 정책을 총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교육부의 성평등 정책 전반을 다루는 컨트롤타워와 전담부서를 설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김성애 위원장은 “중학교에서 처음 접하게 되는 교과서는 청소년들의 자아존중과 자아정체성에 적잖은 영향을 주는 만큼 바람직한 교과서 제작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며 “교과서 집필진 남녀 성비를 균형 있게 맞추고, 집필 내용 외에 삽화·디자인·사진 같은 편집실무단계에서도 성차별 요소를 검수하는 절차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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