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호 노동운동가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라는 책이 있다. 1800년대 중반 영국 노동자계급의 노동조건과 생활상을 분석하고 운동 방향을 제시한 책이다.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유럽에서 더는 노동운동 지표로 활용되지 않았다. 노동자계급의 처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리체계가 구축되기 시작하던 1980년대 한국 노동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 노동자계급의 상태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80년대 한국 노동자계급 다수는 재산이 없는 무산계급이었다.

그로부터 한국 노동운동에는 30년이 축적됐다. 민주노조운동이 꽃피고 자본·정권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다. 노동자계급의 임금·복지·노동조건은 향상됐다. 그 결과 한국 노동자계급의 상태가 바뀌었다. 착취의 쇠사슬밖에 잃을 것이 없던 무산계급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남기는 처지로 안정됐다. 중심부 노동자는 이 체제에서 지킬 것이 더 많은 집단으로 계층 상승했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한국 노동자계급의 바뀐 상태를 분석하지 않았다. 계급·계층의 상태에 근거하지 않다 보니, 노동운동의 주장과 투쟁은 갈수록 메아리 없는 아우성이 됐다. 노동자계급 처지가 바뀌었으면 거기에 적합한 실천대안을 내놓아야 하는데, 노동운동은 운동이 출발할 때, 그러니까 노동자계급의 과거 상태를 근거로 시종일관 주장하고 투쟁했다. 바뀐 처지의 노동자계급에게 먹힐 턱이 없었다. 아직도 그러고 있다.

한국 노동자계급의 바뀐 현재 상태를 분석한 글이 왜 없을까 답답했다. 그런 작업을 할 수 있을 만한 몇몇에게 제안도 해 봤다. 노동자계급의 상태에 근거해야 노동운동 실천이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세상을 들었다 놓을 만큼 위세 떨치던 민주노총 투쟁력이 후퇴하는 근저에 무엇이 있을까, 알고 싶었다.

오랫동안 답답증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반가운 책이 나왔다. 받아드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학생운동을 거쳐 노동해방의 꿈을 품고 공장에 들어가 두 번이나 감옥에 갔던 운동가, 필시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읽으며 노동해방의 꿈을 키웠을 이범연이 현장의 생생한 상황을 엮었다. <위장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이다. 부제는 "내부자 눈으로 본 대기업 정규직노조 & 노동자"다. 한국지엠 현장의 조합원과 노조 상태를 다룬 책인데, 다른 중심부 사업장 노동자 상태나 노동조합 모습도 다르지 않으리라. 그래도 한국지엠의 노조·조합원은 대우자동차 시절부터 투쟁 중심에 섰던 단위다.

민주노총의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의 투쟁이 왜 현장에서 먹히지 않는지, 최근에 공공부문에서 일부 정규직이 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는지에 대한 단서가 이 책에 있다. 한 꼭지 소개한다.

『나는 몇 번의 선거를 겪으면서 정치적으로 보수적 흐름과 진보적 흐름의 중간에 투기적 욕망에 뿌리를 둔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하는 흐름이 있다는 것을 느꼈고, 이 흐름이 선거 결과를 좌우한다고 확신하게 됐다. (…) 오래전에 같은 서구에 사는 조합원들과 술 한잔 할 기회가 있었다. 누군가 말했다. “나는 집값 때문에 박근혜 찍었어.” “솔직히 나도 박근혜 찍었어.” 예상보다 많은 조합원들이 박근혜를 찍었다고 했다. 투기적 욕망은 현 지배체제를 정당화시키고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부자들의 욕망에 가난한 자들의 욕망이 포획되고, 그 앞에 줄을 세우기 때문이다. 반면에 가난에 대한 공감은 사회를 바꾸는 힘으로 작동한다. (…) 문제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에게 그런 공감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소유로부터 초월해야 하는 운동가로서 이범연은 자신의 흐트러짐을 드러내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솔직하게 고백한다. 경의를 표한다.

『한국 사회에서 집의 의미는 남다르다. 집은 재산과 동의어이고 대부분 사람들에게 재산을 유지하고 증식시키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나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30년 동안 열심히 집을 키워 왔다. 운도 따르고 해서 전세 1천만원짜리 반지하방에서 시작해서 34평 아파트까지 키웠다. 그런데도 아내와 나는 “그때 돈 좀 있어서 그 집을 샀으면 좀 벌었을 텐데…”라며 아쉬워하곤 한다.』

이범연의 고백은 중심부 사업장 노조활동가들의 평균상태일 것이다. 아니 노조 바깥의 노동운동가 다수도 실제로는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 처지의 활동가에게 과거 방식의 논리체계가 먹힐 수 있겠는가.

노동현장에서 제2, 제3의 이범연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이런 솔직하고 생생한 글이 계속 나와야 한다. 그래야 노동운동이 제대로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정신적으로 게을러터진 한국 노동운동 풍토에서 많이 팔리지는 않겠지만, 누군가에게 운동의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노동운동 현 상태가 답답하다면 꼭 읽어 보시라. 노동운동 전환을 고민한다면 반드시 읽어 보시라. 이론서가 아니라서 술술 넘어가는 책이다. 그러면서 진한 여운을 남기는 책이다. 현 시기 활동가의 필독서다.



노동운동가 (jshan8964@gmail.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