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기자는 취재의 끝에서 늘 공무원과 공기업 직원을 접한다. 마필관리사 자살 취재의 끝은 공기업 마사회 간부와 농림축산식품부 공무원이다. 화물연대나 지하철 파업 취재의 끝도 국토교통부나 서울시 공무원이다. 비정규직 광부 취재의 끝엔 공기업 대한석탄공사와 산업통산자원부 공무원이 나온다. 산재은폐 취재의 끝엔 근로복지공단과 고용노동부가 있다. 국공립어린이집 취재의 끝도 보건복지부와 지방정부 공무원이다.

나는 20년 넘게 취재의 끝에서 공무원과 공기업 간부들을 만났다. 내가 처음 '기자질'을 할 때만 해도 시골 면사무소에서 인감증명서 한 통 떼려면 면서기에게 담배 한 갑쯤은 사 줘야 했다. 그보다 더 옛날엔 공무원이 민간기업보다 훨씬 박봉에 시달려 공무원 일가족 자살도 간간이 뉴스가 됐다. 그래서 행정고시가 아니고선 공무원시험에 경쟁률이라는 것도 없었다. 1990년대 초 대학 졸업 때만 해도 4년제 대학 나와 9급 공무원시험 쳐서 합격했다면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들고 다녔다. 심지어 친구들에게 숨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변했다. 공무원은 누구나 선망하는 직업이 됐고, 수많은 젊은이가 공시족이 돼 노량진에서 헤매고 있다. 박봉이던 월급도 안정을 찾았고, 무엇보다 시대정신처럼 돼 버린 잦은 해고 대신 공무원은 지금도 정년보장의 동아줄을 잡고 평생직장 신화를 이어 가고 있다.

공직사회도 많이 바뀌었다. 9급 말단 공무원만 돼도 동네 자영업자들에게 횡포 부리던 시절은 지나가고, 권위의 상징이던 동사무소는 주민센터로 이름이 바뀌었고, 서울에선 ‘찾동(찾아가는 동사무소)’이란 서비스도 한다. 카페처럼 꾸며 북카페로 이용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바뀌지 않은 게 있다. 겉모양은 화려하게 변했지만 공직사회는 여전히 국민 위에 군림하는 자세를 보인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복지부동이 여전하다.

20여년 동안 업무가 늘어날 때마다 민간위탁이니, 용역이니 하면서 공공업무를 모두 민간에게 내맡기고 사무실에 앉아 윗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계획서나 보고자료 만들면서 시간을 보내기 일쑤다.

마치 은행에서 최일선 창구직원들이 정규직 대신 비정규직들로 대체된 것처럼 노동부의 일선 창구엔 다양한 비정규직이 수두룩하다. 정권마다 무슨무슨 일자리정책이 필요하다고 하면 관련 직원들을 비정규직 민간인으로 채워서 시키면 그만이다.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비행기를 탈 때까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공사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이다. 총을 든 보안요원도 비정규직이고, 화장실과 흡연실을 치우는 여성노동자도 비정규직이다. 기내에 오르려고 지나는 탑승교를 설치하는 사람도 비정규직이다. 공사 정규직은 뭐하는 사람인들가. 기획서 작성하고 사업계획 짜고, 결산하는 게 그들의 주요 임무다.

문재인 정부를 포함해 역대 모든 정부가 얘기하는 ‘핵심과 비핵심’ ‘상시와 비상시’ 업무의 구분법으로 봐도 화장실 청소는 상시 업무다. 흡연실 업무도 늘 해야 하는 일이다. 종이 만지는 일이야 인공지능으로 대체해도 그만이다. 기획과 결산 일은 연초와 매달 말일, 분기 말에 하면 된다. 날마다 할 일이 아니다. 만약 인공지능에게 12년 연속 ‘세계공항 평가 1위’에 기여한 직렬을 정하라면 공사 정규직은 아닐 것 같다.

누가 언제부터 나눴는지도 모르는 ‘핵심과 비핵심’은 이렇게 이상하게 비틀어져 있다. 마사회엔 말과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핵심에 앉아서 어떤 업무는 인소싱할 수 있고, 어떤 업무는 안 된다고 말한다. 말을 만지고 타고 돌보는 모든 사람은 비핵심이라고 밖으로 밀려나 비정규직 신세가 됐다. 이게 정상인가.

이런 엉터리는 언론이 만들었다. 지난 25일자 중앙일보 30면엔 수석논설위원이 기명칼럼으로 '이제 인천공항을 놓아 주자'고 썼다. 그는 “구조가 가장 복잡한 공기업(인천국제공항공사)의 비정규직 1만명을 군말 없게 정규직으로 만드는 일이 일곱 달 안에 가능할까”라고 되물으며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입사) 게 ‘정의’라고 말한다. 잘못돼도 뭐가 한참 잘못됐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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