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글 제목의 구호가 신문 기사 사진에 나온 걸 보고 자본가가 내건 구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인천국제공항공사의 ‘노동조합’이 내건 구호였다. “공항은 주권이다”라는 표어가 노동조합 이름 위에 찍혀 있다. 내건 구호 중 한심한 게 또 있다. “무임승차! 웬말이냐! 공정사회! 공개채용!”이다. 비정규직의 직접고용을 ‘무임승차’로 보고 있는 것이다.

지난 십몇 년 동안 인천국제공항이 글로벌 수준의 공항이 되는 데 별로 기여한 바도 없을 인천국제공항공사 신입사원이 했다는 말은 더욱 가관이다. “고시촌에서 공부해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입사했다”는 고생담을 비정규직의 직접고용에 반대하는 논리로 삼은 것이다. 이건 노동자의 논리가 아니라 ‘주인님’을 위해 봉사하는 집사나 마름의 논리다.

“고시촌에서 공부해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는 것”과 기회의 평등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부모 잘 만나 상류층에 속하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혹은 절대적으로 편하게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기도 한다. 같은 시험지를 갖고 입사시험을 치르지만, 출발선에서도 기회의 평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험지로 시험을 치르게 해서 보장되는 가치는 평등이 아니라 평균이다.

설사 기회의 평등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이 평등의 전부는 아니다. 진정한 평등은 기회의 평등을 넘어 과정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이 보장될 때 실현되는 가치다. 과정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 없는 기회의 평등은 결국 껍데기로 전락해 불평등을 이념화·구조화한다. 인천국제공항을 비롯해 사회 곳곳의 일터에서 우리가 목도한 바다.

노동조합은 우선적으로 결과의 평등을 도모하게 돼 있다. 처우와 소득에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격차를 줄이려 노력하는 동시에, 노동자들 사이의 연대를 위해 노동자와 노동자 사이의 격차를 줄이려 노력한다. 기업 안에서만 격차를 줄이려는 시도는 한계가 있으므로, 노동조합운동은 그 생리상 기업의 울타리를 넘어 산업과 사회에서 불평등한 처우와 소득 격차를 줄이려 노력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노동조합은 기업 울타리 안에서의 결과의 평등이 다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자연스레 과정의 평등과 기회의 평등으로까지 자신의 시야를 확장한다. 노동운동이 사회적 대화 혹은 노정-노사정 교섭이라 부르는 노력을 통해 노동시장에 개입하고, 사회경제적 정책을 조율하고, 사회복지 제도를 개선하는 사업들을 펼쳐 나가려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이를 우리는 산별노조운동(industrial unionism)이라 부른다.

한국 사회 지배층들은 기회의 평등이 존재하는 것처럼 포장하지만, 사회경제적 평등이 뒷받침하지 않은 기회의 평등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누구나 인정하듯 정확히 20년 전 발생한 ‘IMF 위기’ 이후 한국 사회 사회경제적 평등은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권을 내리 거치면서 크게 훼손됐다. 촛불항쟁 덕분에 집권한 문재인 정권하에서도 별다른 개선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사이 한국 사회는 ‘고시 공화국’으로 전락했고, 획일화되고 기계적인 시험을 통과하는 능력을 노동시장이 요구하는 능력과 동일시하는 이데올로기가 확산돼 왔다. ‘고시 공화국’의 맨 위엔 사법고시와 의사고시가 자리 잡고, 그 아래를 공무원시험과 공공·민간기업 입사시험이 채우는 형국이다. 같은 시험지를 기계적으로 푸는 행위 그 자체를 기회의 평등으로 착각하는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서다. 다시 말하거니와 같은 시험지를 푸는 행위는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평균일 뿐이다.

직업 때문에 인천국제공항을 일 년에 수십 번 오가고 해외 공항들을 많이 경험하게 된다. 이런 경험을 통해 인천국제공항의 우수함과 편리함에 좋은 점수를 주게 된다. 하지만 내가 인천국제공항에서 만나는 노동자들 가운데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은 한 명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탑승권 발권과 짐 부치기는 항공사 직원들이 한다. 여행자보험은 보험사 직원들이 처리한다. 여권 검사와 보안 검색은 외주업체 직원들이 한다. 출국 심사나 귀국 시 세관 검사는 법무부 직원들이 한다. 잘 관리되는 화장실 청소는 하청업체 직원들이 한다. 면세점 물품 역시 외부 기업 직원들이 판다. 커피숍이나 식당도 다 외주다. 탑승 게이트 요원들도 외주라고 한다.

비행기를 탈 때까지 인천국제공항공사가 정식으로 채용한 정규직 한 명 만나기 힘든 구조다. 세계 최고의 공항을 유지하기 위해 일선 현장에서 온몸으로 뛰는 사람들은 죄다 비정규직이나 외주·외부업체 노동자들이다. 공항을 유지·관리하는 핵심 업무에 종사하면서 오랫동안 고생한 이들을 직접고용하는 게 ‘무임승차’를 허용하는 것이고 ‘공정사회’에 반하는 것일까. 오히려 이들에 대한 직접고용이야말로 제대로 된 ‘기회의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 아닐까.

“결과의 평등 NO! 기회의 평등 YES!” 구호에서 ‘산별노조운동’의 전망을 잃어버린 공공부문 기업별 정규직 노조주의의 실체를 마주한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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