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정말 오랜만에 보는 단행본이다. 연일 쏟아지는 여러 토론회 자료집도 다 읽기 버거워 당분간 단행본은 피하려 했다. 10여년 세월을 두고 그와 몇 번 스치듯 만났다. 짧은 인터뷰도 몇 번 했다. 그가 일하는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같은 서울이라도 심리적 거리가 상당하다. 서울 도심에서 버스로 가면 1시간30분쯤 걸린다. 서울역에서 KTX로 대구 가는 시간이다. 연구소는 중랑구 면목동 옛 YH무역 터에 자리 잡은 녹색병원 안에 있다.

앉자마자 대뜸 내게 책부터 내밀었다. <화학물질, 비밀은 위험하다>(김신범, 포도밭)는 제목이다. “따끈따끈합니다.” 11월16일 받은 책은 발행일이 11월17일로 돼 있다. 내일 나올 초판신문을 보는 듯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책을 폈다. 아니나 다를까. 웬만하면 폼 나게 격언 하나쯤 쓰고 사인해서 건네련만 당최 그런 게 없다. 내가 본 김신범 실장은 늘 이렇게 담백했다. 그를 볼 때마다 수도자를 보는 듯했는데, 역시나 작은 교회 목사님의 아들이었다.

일체의 치장을 모르는 그의 책은 내재된 분노로 가득했지만, 다듬고 다듬어 절제하고 또 절제했다. 김신범의 화학물질 이야기는 1993년 서울대 수원캠퍼스에서 시작한다. 공장 이전에 실패한 그는 진로를 잡지 못한 채 92년 한 해를 오롯이 폐인처럼 지냈다. 93년 어느 맑은 날, 그에게 한 선배가 찾아와 산업재해와 직업병을 공부해서 노동자를 위한 일을 하라며 대학원 진학을 추천했다. 94년 늦여름 기적처럼 2점대의 학점으로 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보건대학원에 진학했다. 99년 그가 대학원을 졸업할 즈음 원진레이온 피해자들이 병원과 연구소를 만들었다. 그는 자연스레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창립 멤버가 됐다.

직업병은 동물 중에 사람만 걸린다. 코를 찌르는 냄새와 따가운 눈 자극만으로도 동물은 도망간다. 그러나 사람은 이 모든 신호를 받아들이고도 견딘다. ‘가난’이 발목을 잡아서다.

원진레이온과 문송면을 배우며 시작한 화학물질 공부는 2001년 성수공단 화학물질 도매사업장과 제화공, 2002년 울산 SK케미칼 혈액암 사망, 파주 단추공장 노동자, LG정유 특수건강검진 조작, 2004년 LG정유 파업 등 철저히 현장에서 이뤄졌다. 2010년 금속노조 발암물질조사를 통해 그는 ‘10원이라도 더 싸게’가 낳은 악마의 유혹을 목격했다.

2011년 군산의 타타대우상용차 노사가 이뤄 낸 ‘발암물질 없는 사업장’ 같은 성과도 잠시, 그는 지난해 가습기 살균제 국정조사 예비조사위원으로 참가해 가습기 살균제 개발자 SK케미칼과 제조한 옥시, 옥시를 변호한 김앤장, 제품을 판매한 롯데·홈플러스·이마트 등 대형마트의 민낯을 봤다.

그가 닥치는 대로 책과 논문을 읽으며 만난 로렌초 토마티스 교수는 세계보건기구의 국제암연구소를 이끈 석학이다. 토마티스 교수는 사람이 발암물질에 노출돼 암에 걸리는 근본원인을 ‘빈곤과 불평등’ 때문이라고 꿰뚫어 봤다. 콜레라는 가난한 사람과 부자를 가리지 않지만, 직업병은 빈부를 가린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토마티스 교수가 죽은 다음해 책으로 그를 만났다. 그에게 ‘알 권리’를 가르친 수전 해든 교수도 그는 생전에 만나지 못했다. 간절함이 그를 고인이 된 스승들에게 인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정부나 기업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 모두에게 말을 건다. “더 이상 기업과 정부를 그냥 믿어 줘선 안 된다”고.

김신범의 책 <화학물질, 비밀은 위험하다>는 두 가지 이유로 가볍다. 첫째 그는 일찍 서울일반노조에 가입해 노동자의 언어로 말하는 법을 배웠다. 때문에 책은 일기장처럼 가볍게 읽힌다. 둘째 코팅하지 않은 값싼 종이를 사용해 나무를 덜 다치게 한 책이라 가볍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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