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민 직업환경의학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2013년 한 제조업 사업장에서 지난 10년간 근골격계질환으로 산업재해 승인을 받은 경험이 있는 노동자를 모두 면담한 적이 있다. 500여명의 노동조합원 중 20%가 해당됐다. 게다가 그 사업장 노동자들은 집단산재요양 투쟁을 통해 작업장을 변화시킨 역사를 가지고 있고, 여전히 노동조합이 적극적으로 산재 신청과 요양 과정을 돕고 있기도 했다.

그런 특별한 사업장이었는데도, 내가 만난 연구 참여자들은 산재 요양 중 주눅이 들고,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웠다고 호소했다. 근골격계 산재 노동자에 대한 낙인 때문이었다. 특별히 상처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너무 흔한 질병인 근골격계질환으로 산재 요양을 한 노동자들은 게으르고 무책임하며, 제도를 악용하여 쉽게 돈을 버는 ‘나이롱환자’라는 낙인 때문에 ‘몸 아픈 것보다 더한 고통’을 겪었다.

인터뷰에 참여한 근골격계 산재 노동자들은 요양기간 동안 꾀병환자로 낙인찍히는 것이 두려워 동료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사회활동을 스스로 제한했다. 문상 가서 술을 마셨다고 뒷얘기를 듣고 마음 상하기도 하고 ‘아프다더니 운동한다’는 손가락질이 두려워 사람들이 없을 시간을 골라 운동을 하기도 했다. 요양기간 동안 즐거운 곳에는 아예 발걸음을 멀리하는 게 상책이었다. 본인이 이러한 낙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괴로웠던 산재요양 경험자들도 ‘나는 아니지만 일부 꾀병환자가 있다’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런 낙인과 편견은 소위 ‘전문가’들에게도 차고 넘친다. 10월 말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와 재해상담팀 합동워크숍에 참석했다. 삼성전자 LCD공장 노동자의 다발성 경화증을 업무상재해로 인정한 대법원 판례 소개가 있었다. 대법원 판례에 따라 근로복지공단과 질병판정위원회에서도 행정청이 제대로 조사하지 못하거나(혹은 안 하거나) 사업주가 영업비밀로 자료를 제공하지 않을 경우 이런 부분을 “노동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하는 '추정의 원칙'을 도입한다는 것이었다. 또 뇌심혈관질환의 업무상재해 여부 판단에 있어 법원은 이미 기초질환 혹은 기존 질환이 있더라도 이에 관계없이 과로가 있었는지 여부에 따라 판단한다는 보고도 있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고용노동부 공무원의 말대로 ‘직업성 질환을 좀 더 폭넓게 인정하려는 사회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내용들이었다.

그런데 워크숍 참가자들의 반응이 꼭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특히 한 대기업의 안전보건담당 직원이라는 질판위원은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시했다. “근골격계질환으로 산재하고 싶다고 찾아오는 자기 회사 노동자 중 50% 정도는 밖에서 다친 것을 일 때문에 아프다고 하는 것 같다”는 근거 없는 편견을 아무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멀쩡하게 배구 동호회를 하던 사람이 어깨가 아프다며 찾아온다”는 인신공격도 이어졌다. 이런 허풍쟁이 노동자들의 말을 어떻게 다 믿고 ‘추정의 원칙’을 적용하겠느냐는 항변이었다.

어깨 부담작업을 오랫동안 해 온 노동자라면, 배구경기 후 어깨 손상이 왔다고 하더라도 무조건 업무상재해가 부인되지 않는다. 만일 그 손상이 어깨 부담작업에 의한 만성적인 근골격계질환과 급성 손상이 동반된 경우라면 업무상재해로 승인될 수 있다. 그 질판위원의 발언은 직업병과 업무상재해에 대한 이런 기본적인 이해가 부족할 뿐 아니라 산재 노동자들에게 쉽게 씌워질 수 있는 낙인을 공고히 하는 매우 폭력적인 것이었다. 산재 노동자에 대한 이런 심각한 편견을 거침없이 토로하는 사람이 ‘전문가’라는 이유로 질판위원이 되고, 수많은 산재 노동자들을 위축시키는 이런 태도가 입장 차이라는 미명으로 공적인 자리에서 발화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다.

사회적 낙인은 노동자의 업무상재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하며, 재해근로자의 재활 및 사회 복귀를 촉진한다는 산재보험의 목적을 완전히 거스른다. 만성적 스트레스의 원인이 돼 노동자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에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낙인찍힐 수 있다는 두려움만으로도 사회적 관계를 제약하고, 삶의 질을 저하시키며, 우울증상을 야기하기도 한다. 당연히 질병의 조기 발견과 조기 치료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고통을 호소하는 노동자의 절반은 거짓말쟁이라고 재단하는 사람은 노동자의 고통에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을 것이다. 산재 노동자에 대한 낙인을 경계하는 사회에서만 ‘직업병’이라는 노동자의 아픈 경험에서 ‘안전하고 건강한 일터’라는 뒤늦은 교훈을 건져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