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호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촛불혁명 시위에서 “이게 나라냐”는 구호가 있었다. 이 구호는 “이게 정부냐”는 구호보다 근본적인 물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든 박근혜 정권이든 모두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벗어나 있고, 이것은 결국 대한민국 국가가 정상적인 국가, 즉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종속 파시즘적 국가라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나 이 구호는 여전히 지배계급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비과학적 인식을 보여 준다. 이 구호는 국가란 그 구성원인 국민의 이해와 요구를 실현하는 장치라는 환상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파시즘 국가든 자유민주주의 국가든 애초부터 국민은 주인이 아니다. 국민의 이해와 요구를 실현하는 장치가 아닌 것이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언명했듯이 근대국가 기구는 “단지 부르주아지의 공동사무를 관리하는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국가는 그 국가의 실질적 주인인 특권 부르주아지(금수저)와 비특권 부르주아지(은수저)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지, 그들을 제외한 절대 다수 국민인 노동자·민중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지 않는다. 비정상적 국가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근대국가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르주아 국가, 근대국가에 노동자·민중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할 것을 기대하면서 그 기대를 배반한다고 분노하는 것은 도둑에게 “도둑이 왜 도둑질하느냐”고 분노하는 것에 비견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게 나라냐”고 외치면서 수구정권을 축출하고 난 지금 국가란 도대체 무엇인지를 따져 물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근대국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일 뿐 아니라 “부르주아계급의 지배도구, 노동계급과 근로인민에 대한 조직된 폭력기구”다. 막스 베버는 <소명(召命)으로서의 정치>라는 저서에서 “국가란 폭력·강권력을 독점으로 행사하는 정치 결사체”라고 했다. 이때 정치적으로 결사하는 것은 형식상 국가 구성원인 모든 국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결사에 참가하는 지배계급이다. 즉 국가는 지배계급의 정치적 결사체다. 다카시 사카이라는 사람은 <폭력의 철학>에서 “국가란 가장 위험한 폭력을 독점한 집단”으로 규정한다. 베버의 규정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면 정치란 무엇인가.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이스턴은 “정치란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의 정치는 국가 정치뿐만 아니라 공동체 정치에도 해당한다. 씨족과 부족으로 이뤄진 원시공동체에서도 사회적 가치는 권위적으로 배분됐다. 그러면 그런 원시공동체 정치와 국가 정치는 어떻게 다른가. 국가 정치는 사회적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한다는 점에서 정치일반에 속하지만 폭력에 기반한 강제에 의해 권위를 행사한다는 점에서 무계급사회, 즉 국가(허구적 공동체)와 계급이 없는 진정한 공동체의 권위와 현저하게 다르다. 마르크스는 일찍이 자신과 자신이 이끄는 제1 인터내셔널 총평의회를 권위주의적이라고 비난하는 무정부주의 민주주의자들에게 맞서 자신과 총평의회가 발휘하는 권위는 순전히 도덕적 권위이며, 폭력을 배경으로 한 강제에 의거하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가 행하는 정치란 폭력의 공적 독점을 배경으로 권위를 가지고 강제를 행사하는 것, 통치하는 것, 다스리는 것이다.

근대국가와 국가 정치가 그러한 것이라면 한편으로는 수구정권들의 이런저런 적폐를 청산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그들의 패악적 통치를 가능하게 한 파쇼국가 자체를 해체해야 할 것이다. 적폐만 청산해서는 파쇼국가는 의연히 남아 있을 것이므로. 다른 한편으로는 파쇼국가를 해체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 자체의 해체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국가는 폭력을 배경으로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비폭력적으로 자기 스스로 다스리는 공동체 정치를 상상해야 할 것이다.

최근 사법부 수장 교체를 둘러싸고 사법이 문제로 되고 있다. 사법이란 무엇인가. 국가가 행하는 통치 기능, 다시 말해 정치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의 충실한 지킴이 역할을 하고 퇴임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정치세력의 부당한 영향력이 조금이라도 허용되는 순간 어렵게 이뤄 낸 사법부 독립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고 일갈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스스로 행정권력의 시녀노릇을 해 놓고 이제 새로운 권력에 영향을 받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적반하장이다. 더구나 사법부가 행정부에서 독립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부르주아헌법의 원리 가운데 하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법부가 정치적 역할을 하지 않는 것처럼, “정치세력의 영향을 허용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무지를 넘어 국민 기만행위다. 사법부는 부르주아 계급지배 질서의 최종 수호자로 정치적 역할을 한다. 그래서 큰 권위를 갖고 있다. 이런 사법부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세력으로서 부르주아계급 이상의 정치세력이 어디 있으며, 그들의 영향력 이상의 큰 영향력을 누가 행사하고 있는가.

우리가 더 주목하는 지점은 그가 사법부를 수구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이다. 그의 사법부는 블랙리스트로 진보적인 법관들을 체계적으로 배제시켰다. 그가 이끈 대법원은 2012년 전교조 시국선언 교사에게 유죄를 판결했고, 2013년 정기상여금 통상임금 소급분 요구를 신의성실 원칙을 적용해 제한했으며, 2014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유효 판결을 냈고, 철도노조 파업 참가자들의 업무방해 혐의에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깼으며, 2015년 KTX 승무원이 철도공사의 근로자가 아니라고 판결했고, 이석기 내란선동을 유죄로 선고했으며, 지난해 산별노조 하부조직의 기업별노조 전환을 허용했다.

이런 수구적 판결 때문인지 어느 지방법원 판사는 “재판이 곧 정치”라는 글을 내부게시판에 올려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과거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 판사들이 법률기능공으로 자기 역할을 축소하고 근근이 살아남으려다 보니 정치에 부정적 색채를 씌운 것 같다”며 “정치색이 없는 법관 동일체라는 환상적 목표에 안주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고 비판했다. 이어 “그런 구시대적 통념을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판사의 말대로 사법은 쓸데없는 귄위주의 검은 법복을 벗고 자신이 정치의 한 영역임을 솔직히 인정해야 하고, 동시에 자본계급의 통제가 아니라 민중의 정치적 통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에 근거해 수구사법부를 해체해야 한다.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seung742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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