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9월 정리해고된 시그네틱스 노동자 9명이 서울남부지법 앞에서 해고무효 판결을 받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은영 기자

소리 없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안도의 한숨은 그 다음이었다. 20대 젊은 여성들이 40~50대 중년이 된 17년의 시간 동안 세 번의 해고, 두 번의 복직 판결이 있었다. 그리고 이날 마지막 세 번째 해고에 대한 무효 판결을 받았다. 법정을 나온 여성노동자들은 “이겼다” “수고했다” 서로를 다독였다. 입은 웃는데 눈은 울었다.

“이길 줄 알았다”

지난 1일 오전 서울남부지법 310호 법정 앞에 여성노동자들이 속속 모였다. 윤민례 금속노조 시그네틱스분회장과 김양순 수석부분회장은 선고공판이 시작됐는데도 법정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윤 분회장은 “(법정에) 앉아 있으면 떨린다. 시간 맞춰 들어가야겠다”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법정에서 시그네틱스 해고노동자 9명이 제기한 해고무효확인소송 선고는 여섯 번째로 진행됐다. 윤 분회장과 김 수석부분회장이 뒤늦게 법정에 들어가 앉자마자 재판장 선고가 이어졌다.

“피고(시그네틱스)가 2016년 9월30일 원고들에 대해 한 해고는 무효임을 확인한다.”

지난해 9월 경영상 위기를 이유로 세 번째 해고된 9명의 여성노동자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울었다. 2001년 첫 번째 징계해고 뒤 17년째 해고자 신분인 윤 분회장은 미리 준비한 리시안서스꽃 한 송이씩을 조합원들에게 건넸다. “이길 줄 알았다. 수고했어.”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의 싸움은 2000년 4월 영풍그룹이 시그네틱스를 인수하면서부터 예고됐다. 영풍그룹은 ‘무노조 경영’과 ‘정규직 없는 생산공장’을 경영이념으로 내세우고 파주공장을 사내하청 비정규 노동자로 채웠다.

2001년 7월 사달이 났다. 회사는 서울공장을 폐쇄하고 정규직 노동자들을 투자규모가 작은 안산공장으로 발령했다. 조합원 160여명이 점거농성을 하며 파업에 들어갔고 이 과정에서 95명이 해고됐다. 다행히 부당해고 판정을 받고 복직했으나 불법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징계해고된 윤 분회장을 포함한 29명은 여전히 해고자 신분이다.

회사는 2011년 7월 안산공장 생산량 감소를 이유로 정리해고에 나섰다. 28명의 노동자가 해고됐고 2012년 법원은 다시 한 번 부당해고 판결을 내렸다. 두 번째 복직이었다.

윤민례 금속노조 시그네틱스분회장이 해고무효 판결을 받은 조합원들에게 꽃 한 송이씩 나눠 주고 있다. 이은영 기자


노조 “긴박한 경영상 이유 없어”

해고는 두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회사는 안산공장을 폐업한 뒤 광명사업부를 만들었다. 지난해 9월 광명사업부 경영악화를 이유로 노동자 22명을 또다시 정리해고했다. 22명 중 9명이 회사를 상대로 해고무효확인소송을 제기했고 이날 세 번째 복직 판결을 받아 냈다.

부당해고 판결을 받은 김양순 수석부분회장은 “눈물이 안 날 줄 알았는데 울컥했다”며 “내가 선택한 이 투쟁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고 말했다.

회사는 재판 과정에서 긴박한 경영상 이유에 따른 정당한 해고였다고 주장했다. 광명사업부가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누적적자액이 22억원에 달하고, 경기부진으로 수주물량이 계속적으로 줄어드는 등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향후 수익성이 개선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취지였다.

노동자들은 “긴박한 경영상 필요의 판단기준은 회사 전체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며 “일개 사업부서에 불과한 광명사업부를 판단기준으로 삼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박했다. 법원은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회사는 2011년 두 번째 정리해고 당시에도 “파주공장과 안산공장은 실질적으로 분리경영을 하고, 흑자인 파주공장과 달리 안산공장은 적자”라며 정리해고 정당성을 강변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두 공장은 분리돼 있지 않을뿐더러 (정리해고 당시) 152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렸다”며 “해고자들을 파주공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음에도 해고회피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며 부당해고로 판단했다.

“2001년 해고자 19명 복직투쟁 시작”

17년간 해고자 신분으로 세 번의 정리해고와 세 번의 부당해고 판결을 지켜본 윤민례 분회장은 “지난해 세 번째 해고를 앞두고 가장 힘들었다”며 “참 많이 울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17년간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이렇게 말했다.

“다 이긴 것 같은데 또다시 투쟁을 결의해야 할 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첫 번째 해고 첫 번째 복직, 두 번째 해고 두 번째 복직 그리고 세 번째 해고까지. 저는 첫 번째 해고 때 불법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징계해고됐잖아요. 제 복직 투쟁을 해야 하는데 계속 정리해고가 되니 복직투쟁을 할 여건이 안 됐죠.”

17년간 세 명의 조합원이 세상을 떠났다. 윤 분회장은 “세 분의 조합원 모두 ‘복직하고 싶다’는 염원을 제 가슴에 남겨 놓고 가셨다”며 “산소에 (승소)판결문을 가지고 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노조 조합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해고되고 길거리로 내몰렸다”며 “이제 1차 정리해고 당시 해고된 19명의 복직투쟁을 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의 투쟁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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