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이 31일 금속노조 기아자동차지부가 낸 임금청구 소송에서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판결하면서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 1심 판결이긴 하지만 원고가 2만7천424명(사망노동자 포함)이나 되는 데다, 국내 최대 대기업에서 불거진 임금갈등을 정리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제조업 임금체계 개편논의를 촉발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신의칙 기준 '기업 경영 상황' 따라 엄격히 적용

이번 소송은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부는 2011년 10월 하기휴가비 등 복리후생명목 임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며 미지급임금을 법원에 청구했다. 2013년 12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통상임금 산입범위에 정기상여금이 포함된다고 판결했다. 다만 회사가 어려우면 체불임금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예외조건을 달았다. 이른바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이다. 지부는 2014년 3월 전원합의체 판결을 적용해 청구취지 변경신청을 했다.

소송 초기에 지부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신의칙을 적용해 회사 손을 들어주는 법원 판결이 잇따르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 이달 18일 광주고법은 금호타이어 노동자들이 제기한 임금소송 항소심에서 1심을 뒤집고 청구를 기각했다. 광주고법은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돼 노사가 합의한 임금수준을 넘어선다면 회사에 새로운 재정적 부담을 안겨 경영상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업 존립을 위태롭게 할 수 있어 금호타이어의 신의칙 항변을 받아들인다"고 판결했다.

아시아나항공·한국지엠·현대중공업·한진중공업·현대미포조선 노동자들이 낸 통상임금 소송도 2심 재판부가 신의칙을 적용해 원심을 뒤집었다. 두산중공업·현대로템 사건에서는 아예 1심부터 신의칙이 적용됐다.

기아차는 이번 소송에서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하는 실무가 장기간 정착됐고, 이 사건 청구로 새로운 재정부담을 지우는 것은 신의칙에 위반된다"고 항변했다. 언론사들을 상대로는 "통상임금 소송에서 패하면 최대 3조원이 넘는 채무가 발생하고, 경우에 따라 공장 해외이전이 불가피할 수도 있다"는 내용의 보도참고자료를 배포하며 여론전을 펼쳤다.

서울중앙지법은 그러나 이날 판결에서 체불임금을 지급했을 때 실제 경영위기가 발생하는지 여부를 따진 뒤 "마땅히 받았어야 할 임금을 이제야 지급하는 것을 두고 비용이 추가적으로 지출된다는 점에만 주목해 이를 경영에 중대한 위협이 된다고 관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시했다. 신의칙을 엄격히 적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바빠질 듯
현대차도 사실상 소송 당사자


이날 판결로 대법원 발길이 분주해질 전망이다. 대법원은 2015년 인천 소재 시내버스업체 시영운수 노동자 23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소송 상고심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했다. 신의칙 기준을 두고 하급심마다 판단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소송 당사자인 기아차와 지부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기아차측은 "청구금액 대비 부담액이 감액되긴 했지만 현 경영상황은 판결금액 자체도 감내하기 어려운 형편"이라며 항소의사를 피력했다. 지부는 "통상임금 문제 해결을 위한 전향적인 안을 제시할 것을 사측에 촉구한다"고 요구했다. 노사 교섭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자는 취지다.

기아차 이웃인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사실상 소송 당사자나 다름없다. 현대차지부가 낸 통상임금 소송은 2심까지 패소해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현대차지부 관계자는 "같은 그룹에 있는 기아차 노동자들은 체불임금을 돌려받고 현대차는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어느 누가 납득할 수 있겠느냐"며 "노사 대화로 통상임금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만큼 기아차 소송 결과에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통상임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소송이나 노사 대화가 전체 제조업으로 확산할 가능성도 있다. 기아차 사건을 맡은 김기덕 변호사(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는 "제조업 맏형 격인 현대자동차그룹에서 통상임금 문제가 정리되면 협력업체 등으로 영향이 확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근 고용노동부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하태경 바른정당 의원에게 제출한 '통상임금 소송현황'에 따르면 100인 이상 사업장 중 115곳에서 소송이 진행 중이다.

특히 이번 판결이 제조업 임금체계 개편 논의를 촉발할지에도 관심이 모아진다. 통상임금은 연장·야간·휴일근로수당이나 연차휴가 미사용 수당 등 각종 수당을 계산할 때 기준이 되는 임금이다. 기업 입장으로서는 정기상여금을 계속 지급할 경우 각종 수당 지출 규모가 커진다.

노동계도 수당을 받기 위해 장시간 노동을 감내하는 현행 임금체계를 바꿔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노동시간을 단축하거나, 연차휴가 사용을 확대하거나, 직무·숙련급을 도입하는 등 임금체계를 개편하자는 목소리가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기아차지부는 "통상임금 문제만 제대로 해결해도 장시간 노동에서 벗어나고 실질임금 확보와 고용창출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소송 결과에 따라 노사 간 자율교섭으로 새로운 임금체계를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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