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종호 직업환경의학 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된 이재용에 대해 특검은 뇌물공여·횡령·재산국외도피·범죄수익 은닉, 그리고 위증의 다섯 가지 혐의를 두고 기소했고 징역 12년을 구형했다. 그리고 얼마 전 1심 판결이 나왔다. 혐의는 대부분 인정하지만 형량은 징역 5년밖에 되지 않는 상식 밖의 판결이었다. 최소 5년에서 최대 45년까지 선고가 가능한 상황이었다는데 최소 형량인 징역 5년을 선고한 것이다. 272쪽에 달한다는 1심 판결문에 담긴 논리와 법리 해석은 잘 모르겠지만 비리와 적폐 청산을 외치며 전 국민이 촛불을 들었던 결과라고 하기엔 분명 초라한 것이다.

사법부 독립성과 법적 판단에 있어 그 어떤 외압도 받지 않게 보장해 준 그것이 진정 순수하게 지켜지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민주주의 시스템에서 국민의 영향력마저 배제해 버린 사법부의 독립성이 무소불위 절대권력이 돼 버린 것은 아닌지, 또한 그러한 독립성을 악용해 권력과 재력의 영향력 안으로 스스로 들어간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현재 특수건강진단도 판결 대상이 되는 사업주의 영향력 안에 자의든 타의든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구조적 문제를 갖고 있다. 이재용 1심 판결과 사법부를 빗대어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사법부가 삼성 하청업체에 소속된 상태에서 판결을 내리는 상황인 것이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구조가 유지되고 있을까. 이러한 현상의 원초적인 원인은 특수건강진단 계약과 직접적인 비용지불 주체가 사업주로 돼 있는 데 있다.

이로 인한 폐해는 디메틸포름아미드(DMF) 사태를 지나며 검진기관과 사업주의 유착관계 등을 통해 충분히 확인됐다. 민주노총은 2007년 특수건강진단 거부운동까지 시행하며 이러한 사업주의 영향력을 없애고 특수건강진단 제도를 총체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계기로 2007년 4월 민주노총·한국노총·노동부·산업의학회 등 특수건강진단 관련 단체들이 ‘특수건강진단제도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토론회’를 통해 이에 대한 대안으로 3자 지불방식 도입 등 비용지불 방식 개편, 노동자에게 검진기관 선택권 부여, 노동부 관리·감독 및 처벌 강화 등에 대한 전반적인 공감대를 형성했다. 심지어 이 토론회 3일 뒤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노동부가 비공개 회의를 갖고 토론회 내용을 포함한 노동부 제도개선안을 함께 검토한 뒤 중장기적 제도개선 TF를 구성하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이러한 전향적인 논의는 2007년 10월부터 2008년 10월까지 진행된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산업안전보건제도개선위원회를 거치면서 노동자 검진기관 선택권 부여, 3자 지불방식 도입 등 중요한 사안이 모두 제외된 채 흐지부지 마무리되고 말았다. 2008년 2월부터 이명박과 박근혜의 집권이 시작됐다는 점이 이러한 경과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특수건강진단은 여전히 사업주 영향 아래 놓여 있다. 2007년의 그 큰 파장을 겪으며 사업주와 특수건강진단 기관의 유착을 끊기 위한 수많은 전향적인 논의와 대안을 제시해 놓고 10년 동안 변한 것은 특수건강진단 기관에 대한 질 관리와 등급 공개가 시행되고 있다는 점뿐이다. 2015년과 지난해 하청업체에서 발생한 수은과 메탄올 중독사고는 10년 전의 논의를 넘어서는 더욱더 전향적인 특수건강진단이 제안되고 실행돼야 함을 시사하고 있지만 10년 전 논의도 아직이다. 새로운 열의를 품은 특수건강진단 개선 TF가 다시 한 번 꾸려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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