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노동자 10명 중 9명이 “고객 이익보다 은행의 핵심성과지표(KPI) 실적 평가에 유리한 상품을 판매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100개 달하는 KPI 지표를 좇다 보면 고객 이익은 뒷전으로 밀린다는 뜻이다. 과당경쟁은 은행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을 초래했다. 은행 수익에도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 제 살 깎기 경쟁이 이어지고 있다.

◇"과도한 실적 목표에 뒤로 밀린 소비자"=금융노조(위원장 허권)가 23일 오전 서울 다동 노조 회의실에서 은행권 과당경쟁 근절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노조는 이날 14개 은행에서 일하는 조합원 3만44명을 대상으로 지난달 실시한 과당경쟁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조사에는 신한은행을 포함한 8개 은행 KPI를 전수조사한 결과도 포함됐다. 일부 은행의 KPI 항목은 무려 97개였다.

목표 달성률은 140~180%였다. KPI로 부여된 목표를 1.8배 달성해야 최고 가점이 부여된다는 얘기다. 내용도 문제였다. 노조가 KPI의 영역별 비중을 조사했더니 62.6%가 ‘상품신규’에 분포해 있었다. 소비자 보호는 2.7%에 불과했다.

“고객 이익보다 은행의 KPI 실적 평가에 유리한 상품을 권한 경험이 있는가”라고 묻자 87%가 “있다”고 답했다. 이유를 묻자 66%가 “과도하게 부여된 목표”를 1순위로 지목했다. “은행 수익을 우선시하는 KPI 평가 제도(56%)”가 뒤를 이었다.

고객 이익보다 은행의 KPI 실적 평가에 유리한 상품을 판매한 사례를 물었더니 응답자의 75%가 “가족·친구·지인 등에게 상품을 강매해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고객의사와 무관한 은행 전략상품 판매”와 “KPI 평가점수가 높은 상품 우선 추천”을 경험한 응답자도 각각 65%와 59%로 조사됐다. 특히 본인 돈으로 은행 상품에 신규 가입하는 이른바 ‘자폭’을 해 봤다는 응답자도 40%나 됐다.

◇"하루 2시간 초과노동에 은행도 손해"=과당경쟁은 고객은 물론이고 은행노동자까지 힘들게 만들었다. 노조가 “은행 생활을 힘들게 하는 요인”을 묻자 65%가 “과도한 실적달성 경쟁”을 꼽았다. 장시간 노동(11%)이 뒤를 이었다.

노조는 응답자의 출퇴근 시간을 조사한 결과에 따라 하루 평균 2시간 초과노동이 발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연간 노동시간으로 환산하면 2천350시간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 지난해 한국 평균 노동시간인 2천69시간보다 300시간가량 많다. 지난해 조사에서 한국은 멕시코 다음으로 노동시간이 긴 나라였다.

응답자들은 노동강도 완화를 위한 개선과제로 “KPI 제도 개선(37%)”을 선택했다. “캠페인·프로모션 억제(24%)”와 “인원충원(24%)”도 요구했다.

노조는 “과당경쟁은 은행 장기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일반고객 역차별로 이어진다”고 우려했다. 2014년 인천공항 제1여객터미널 입점은행 입찰 당시 벌어진 일이 사례로 제시됐다. 노조에 따르면 제1사업자로 선정된 A은행은 최소입찰금의 3.7배에 달하는 630억원을 입찰금액으로 써내 최종 선정됐는데, 예상 손익 대비 매년 수백억원의 손실을 보고 있다.

은행 간 출점 경쟁은 서민 금융소비자 피해로 나타난다. 예컨대 은행들이 고액 자산가에게는 우대금리·수수료 면제 등 '노마진 정책'을 펴면서, 서민 고객에게는 일반금리를 적용한다.

노조는 사용자들에게 KPI 폐기를 요구했다. 노조는 대안으로 △세부 상품판매 평가 제외 및 평가항목 대폭 축소 △금융공공성·소비자보호와 중·장기 실적 비중 확대 △절대평가 방식으로 전환 △단기실적 중심 경영진 평가방식 개선을 요구했다. 금융당국에는 금융소비자 보호 강화를 위해 금리적용 적정 여부 점검과 일반고객 역차별 문제 해결을 위한 개인 신용등급 평가제도 개선을 주문했다. 노조는 올해 산별교섭에서 과당경쟁 근절을 요구할 계획이다.

허권 위원장은 “금융산업 과당경쟁은 금융소비자·노동자·은행 모두를 패자로 만드는 만악의 근원”이라며 “은행은 단기 실적을 강요하고, 노동자는 고객 이익보다는 실적을 위해 장시간 노동에 내몰리고, 소비자는 원하지 않는 금융상품에 가입했다가 피해를 입는 악순환을 이제는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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