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익찬 변호사(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손익찬 변호사(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1. 사건의 개요

망인은 1992년 A은행에 은행원으로 입사해 2013년 1월17일 A은행 B지점 지점장으로 부임했다. 여·수신 영업, 고객 관리 등을 총괄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B지점의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2013년 2월경 A은행으로부터 여신 실적이 부진한 지점으로 지정돼 대책 마련을 지시받았다. B지점 주요 거래처가 대출금리 인하를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망인은 2013년 5월27일 정신과 의원에서 ‘정신병적 증상이 없는 중증의 우울병 에피소드, 비기질성 불면증’ 진단을 받고, 6월3일 같은 의원에 내원해 진료 중 자살을 언급했다. 6월13일에는 출근 후 11시10분경 외출해 오후 1시50분경 배우자에게 전화를 걸어 자살하겠다고 알렸다. 그리고 오후 2시12분경 텃밭 원두막에서 농약을 마시고 목을 매어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현장 및 자택에서는 유서가 발견됐다(대법원 2017. 5. 31. 선고 2016두58840 판결, 이하 대상판결).


2. 대상판결의 요지

대상판결은 망인이 영업업무 및 실적에 관해 중압감을 느꼈다는 점, 그에 따라 지점장 근무 4개월 만에 ‘정신병적 증상이 없는 중증의 우울병 에피소드’로 진단받았다는 점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그리고 제반 사정과 유서내용을 근거로 업무상 부담이 계속된 탓에 질병이 심화돼 자해로 인한 사망에 이르렀다고 보고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했다.

또한 대상판결은 ① 망인의 업무환경이 ‘특별히 가혹한 환경’이 아니어서 망인의 내성적인 성격 등 ‘개인적 취약성’이 자살결의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 ② 망인이 자살 직전에 환각·망상·와해된 언행 등 정신병적 증상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결론이 달라질 수 없다고 했다.


3. 시사점

가. 자해의 산재인정과 관련한 기존 판례의 태도

노동자에게 발생한 부상·질병·신체장애 또는 사망(이하 ‘부상 등’이라고 한다)이 노동자가 수행한 업무와 상당인과관계에 있다고 평가받는 경우를 일컬어 업무상의 재해 또는 산재라고 한다. 상당인과관계에 대한 대법원의 태도는 다음과 같다.

상당인과관계는 주장하는 측에서 입증책임을 진다. 상당인과관계의 내용을 보면 의학적·자연과학적 증명이 아니라 규범적 관점에서 인정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질병에 대한 감수성은 평균인이 아니라 당해 노동자의 건강과 신체조건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본인 기준). 기존 질병이 있더라도 업무로 인해 그 질병이 자연적인 속도에 비해 급격히 악화됐다면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공동원인설).

그런데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사회보장법인 동시에 ‘보험법’이기도 하다. 보험금은 우연히 발생한 사고에 대해서만 지급하면 되고, 피보험자가 일부러(고의 또는 중과실로) 손해를 발생시킨 경우에는 지급할 필요가 없다(상법 659조). 그렇지 않으면 우연적 사고를 대비해 다수가 위험을 분산하는 것이 목적인 보험제도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험법의 일종인 산재보험법 또한 노동자의 고의·자해·범죄행위(이하 ‘자해’라고 한다)로 인한 경우는 산재가 아니라고 본다. 다만 자해가 '정상적인 인식능력이 뚜렷하게 저하된 상태(이하 '정신적 이상상태'라고 한다)'에서 발생한 경우에만 산재로 본다(산재보험법 37조2항, 산재보험법 시행령 36조).

자해가 산재로 인정되려면 ① 업무로 인해 노동자가 정신적 이상상태에 빠졌다는 점 ② 정신적 이상상태로 인해 자해를 했다는 점 ③ 자해로 인해 부상 등이 발생했다는 점이 증명돼야 한다. 그런데 기존 판례에서는 ‘정신적 이상상태’의 의미가 무엇인지,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함에 있어 노동자의 ‘개인적 취약성’을 고려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어 왔는데, 대상판결은 이를 정리했다.


나. 시사점 1 : ‘정신적 이상상태’의 의미를 규명함

기존 몇몇 판례에서는 업무로 인해 정신질병이 생기고 그로 인해 심신상실 내지 정신착란의 상태 또는 정상적인 인식능력이나 행위선택능력, 정신적 억제력이 현저히 저하돼 ‘정신장애’ 상태에 이르러야 정신적 이상상태에 해당한다고 봤다(대법원 2012. 3. 15. 선고 2011두24644 판결). 노동자가 정신장애 상태에 빠져서 자해를 결심한 경우 ‘자유의지’가 없으므로 산재로 인정된다고 봤다.

일반적인 보험법 판례를 봐도 자살에 있어 ‘자유의지’가 없어야만 보험금을 지급받을 수 있다고 한다. 대법원은 피보험자가 ‘정신질환 상태’에서 자신을 해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보험금을 지급받을 자격이 있다고 했다. 그 이유가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대법원 2006. 3. 10. 선고 2005다49713 판결, 대법원 2016. 5. 12. 선고 2015다243347 판결 참조).

그런데 대상판결에서는 대법원 2011두14692 판결, 대법원 2013두23461 판결을 인용하면서 “정상적인 인식능력이나 행위선택능력, 정신적 억제력이 현저히 저하되어 합리적인 판단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라면 정신적 이상상태라고 평가하기에 충분하다고 봤다. 그리고 “자살 직전에 환각·망상·와해된 언행 등의 정신병적 증상”은 없어도 무방함을 밝힘으로써, 노동자가 ‘정신장애’에 빠질 필요가 없다고 봤다.

대법원이 망인의 정신상태가 정신장애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자유의지가 남아 있었는지를 판단하지 않은 이유는 명백하다. 그러한 이분법이 산재판단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자해를 한 노동자에게 자유의지가 있었더라도, 그러한 의지를 갖게 된 동기가 업무로 인한 것인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상판결은 자유의지와 정신장애의 이분법적 구분을 버리고 오로지 망인의 업무환경과 정신병, 그리고 정신병과 자해의 인과관계만을 살펴봤다. 그렇다면 ‘정신적 이상상태’의 의미는 노동자가 ‘자해행위를 결심한 것’ 그 자체라고 봐야 한다. 입법자의 시각에서 본다면 자기파괴를 결심한 마음상태를 두고 ‘정신적 이상상태’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이를 ‘자유의지가 없는 정신장애 상태’라고 읽을 필요는 없다.


다. 시사점 2 : 자해로 인한 산재판단에 있어 개인기준설의 확인

과거 대법원은 자살이 사회평균인의 입장에서 도저히 감수하거나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업무상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우울증에 기인한 것이 아닌 한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대법원 2008. 3. 13. 선고 2007두2029 판결)고 판결했다. 일반적인 산재와 달리 개인기준이 아닌 사회평균인 기준을 적용했다. 또한 대법원은 업무와 자살원인 발병의 인과관계는 개인기준으로, 질병과 자해의 인과관계는 사회평균인을 기준으로 판단해 결과적으로 산재를 불승인한 경우도 있었다(대법원 2012. 3. 15. 선고 2011두24644 판결).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탄광에서 일한 광부가 폐질환으로 사망한 경우 탄광 업무환경과 폐질환의 발병까지는 개인기준설로, 발병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는 사회평균인 기준설에 의해 보겠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대법원은 2012년 이후 다수 판결에서 자살에 있어서도 개인기준설에 입각해 선고했다.

대상판결도 위와 같은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대법원은 망인의 업무환경과 정신질환의 발병, 그리고 업무부담이 가중돼 자해로 인한 사망에 이르렀음을 인정했을 뿐이다. 인과관계의 고리 중 단 한 군데에서도 사회평균인 기준에 근거해 판단하지 않았다. 오히려 질병에 대한 개인적 취약성은 산재인정에 있어 방해가 되지 않음을 선언해 개인기준설이 타당함을 재확인했다.


4. 자살과 다른 산재를 구분해 볼 이유가 없다

노동자가 탄광에서 일하다 폐병에 걸렸다면, 병에 걸린 것은 본인 의지가 아닌 우연적인 사정에 의한 것이다. 노동자가 어떤 환경에서 일을 하다 정신병에 걸렸다면 이 또한 우연적인 사정이다. 정신병이 심화돼 자해를 하게 됐다면, 정신병과 자해로 인한 결과(사망)는 모두 산재에 해당한다.

근로복지공단과 사법부가 해야 할 일은 정신질환의 발병과 그로 인한 자해행위가 업무와 관련이 있는지만 판단하면 된다. 대법원은 자해를 한 노동자가 ‘정신장애’에 이를 정도여서 ‘자유의지’가 없었는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고, 같은 업무환경에서 다른 사람이 일했더라도 똑같은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아서 자해를 했을지 여부도 고민할 필요가 없음을 선언했다. 오로지 ‘그 노동자’가 자해에 이르게 된 원인이 업무로 인한 것인지, 그리고 그 업무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힘든 업무였는지, 다른 개인적인 원인 때문인지에 대해서만 고민하면 됨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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