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병욱 변호사(법무법인 송경)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다며, 서자의 슬픔을 통곡했다. 국민 이름을 가진 바로 그 ‘홍길동’은 부조리한 사회 제도를 타파하기로 마음먹고 행동에 옮긴다. 허균의 창작품이긴 하지만 조선 시대에도 부를 수 있는 ‘아버지’라는 단어를 부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임금에 반항해야만 할 정도로 서글픈 일이었는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2017년 대한민국에서 주권자 국민에게 반항하지 않는다면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 없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노동자’라는 단어다.

사실 노동법은 노동과 관련한 법제를 총칭하는 법률이지만, 정작 노동법의 주체인 노동자들은 노동자로 불리지 못한다. 노동법 어디를 찾아봐도 노동자라는 단어는 없다. 노동자라는 단어가 들어갈 자리에는 모두 ‘근로자’라는 단어가 있을 뿐이다. 심지어 우리나라는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번역도 근로자로 번역한다. 그래서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장관 후보자가 노동자를 노동자로 부르겠다고 하는 것이 화제가 될 정도다.

그러면 어떤 이유로 우리나라에서 노동자를 노동자로 부를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은 주권자인 국민이 제정하고, 기본권과 제도를 정해 두어 대한민국의 기틀이 된 헌법에서 ‘노동자’를 ‘근로자’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라는 단어가 헌법에 쓰이지 못하니, 헌법보다 아래 체계의 법률도 ‘노동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한다. 법률보다 아래 체계인 명령·규칙도 당연히 ‘노동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한다.

노동자를 노동자로 부를 수 없게 된 경위는 아무래도 북한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같은 한자권인 옆 나라 일본도 노동자를 노동자로 부르고, 이미 생활 속에서 우리는 노동자를 노동자로 부르고 있으며, 노동자라는 단어에 익숙해져 있다. 사람은 노동할 권리가 있고, 노동을 하고자 하는 사람, 노동을 하는 사람, 노동을 한 사람 모두 노동자다. 근면한 노동, 즉 ‘근로’는 노동의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노동과 관련한 법을 포괄해 ‘노동법’이라고 부르지 ‘근로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근로자가 근면한 노동자를 말한다면 노동자 중 일부분일 뿐이지 노동자를 포괄하는 단어일 수는 없다. 노동법을 ‘노동’법으로 부르고, 노동을 주관하는 정부부처 역시 고용‘노동’부로 부르며, 노동과 관련한 위원회를 ‘노동’위원회로 부르는 이상 노동의 주체인 ‘노동자’ 역시 근로자가 아니라 노동자로 부르는 것이 올바르다.

노동자들에게 노동자를 노동자로 부르지 못하게 하여 무수한 노동자 홍길동을 불러낼 것이 아니라면, 이제는 노동하는 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하고 ‘근로자’가 아니라 ‘노동자’로 불러보자. 홍길동이 임금에게 반항한 것처럼, 촛불혁명을 완수한 주권자 국민에게 노동자를 노동자로 부르게 해 달라고 반항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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