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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노동자 자유이용권'이 만든 지옥도 ③] 오늘도 우리는 밥을 마시고, 퇴사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정재수 보건의료노조 정책국장
   
▲ 정재수 보건의료노조 정책국장

노동자 자유이용권. 근로기준법이 정한 특례업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압축해 표현하는 신조어다. 통신·의료·광고·운수 등 26개 업종 노동자는 근로시간 특례제도 적용을 받아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다. 집배원 자살이 잇따르고, 명문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입사해 잘나가던 직원이 목숨을 끊고, 버스운전 노동자의 졸음운전으로 대형사고가 발생하면서 과로사와 과로자살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국회는 특례업종을 줄이기 위한 논의를 본격화하고 있다. 하지만 특례업종 가운데 일부를 줄이는 데 그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노동계는 특례업종 폐지를 요구한다. 특례업종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직접 <매일노동뉴스>에 글을 보내왔다. 5회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오늘도 간호사들은 ‘밥’을 마신다. 마실 수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조사에 의하면 간호사 절반은 식사도 하지 못한 채 일한다. 밥을 마시고 다니는 탓에 가벼운 위장 질환은 기본이다. 그뿐이랴. 화장실 갈 시간도 없어 방광염을 앓고 있는 이도 흔하다. 밥 먹을 시간도 없고 화장실 갈 시간도 없는 것이 일상적인 보건의료 노동자의 현실이다.

임신순번제라는 용어는 이제 제법 생소하지 않게 알려져 있다. 교대할 손이 부족한 탓에 한 사람이라도 빠지게 되면 근무(번)표조차 짜기 힘들어 가임기 여성들이 임신의 순번을 정해 두는 이 말도 안 되는 순번제가 진짜 있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노조가 올해 실시한 보건의료 노동자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임신결정의 자율성이 없었다는 응답 비중이 30.5%나 된다. 최근에는 사직순번제라는 용어마저 등장했다. 퇴사조차 눈치 보여 마음대로 하지 못해 순번을 정해야 한다는 농담 같은 현실은 진짜 있는 일이다. 2015년 대한간호협회 조사에서는 신규 간호사의 평균 이직률이 무려 33.9%로 나타났다. 100명 중 34명이 1년을 버티지 못하고 퇴사하는 셈이다.

마음껏 임신조차 하지 못하고, 사직도 순서를 지켜야 하는 상황. 청년실업·고용문제가 심각한 대한민국에서 “내일 드디어 퇴사한다”고 자랑하듯 SNS에 글을 올리는 웃고픈 현실은 ‘레알’이다.

좋은 직장에 속할 법도 한데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걸까. 심각한 이직률로 인해 인력부족 현상이 만연하고, 밥을 마시며 임신순서와 퇴사순서를 기다리는 불행은 도대체 왜 발생하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심각한 노동강도와 장시간 노동이 원인이다.

보건의료산업 노동자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46.85시간으로 법정노동시간보다 주당 6.85시간의 연장근로가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 조사에서도 주 5일 노동(주 40시간 노동)이 보편화되고 있는 가운데 보건의료 노동자 중 10.8%가 여전히 장시간 노동(주 52시간 이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간호사들을 비롯해 의료기사 등 보건의료 노동자들 3분의 2가량은 교대근무를 하고 있다. 주로 8시간씩 돌아가며 근무하게 되는 4조3교대 근무가 기본이다. 밤 10시에 출근해 뜬눈으로 환자들을 돌보는 간호사의 퇴근시간은 새벽 6시가 정상이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 평균 퇴근시간은 아침 9시다. 심지어 이들 10명 중 1명은 오전 10시를 넘어 퇴근하는 12시간 장시간 노동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

근로기준법 위반이 아니냐고? 보건의료산업은 노동시간 특례가 적용되는 사업장이다. 주 12시간 초과 연장근로가 허용되고 있다. 근기법 59조는 공익을 위해 만들어진 조항이다. 그런데 보건의료산업에서는 이 조항이 장시간 노동을 허용해 오히려 공익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장시간 노동이 의료서비스의 질과 환자안전을 위협하고 있는가 하면, 병원의 높은 이직률은 환자안전과 의료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다루는 병원업무 특성상 숙련성·전문성·책임성·연속성·협업성이 필요하지만 잦은 이직과 신규입사자 비중 증가는 환자안전과 양질의 의료서비스 제공에 필요한 요소를 저하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숙련도가 높은 고연차 인력은 잦은 이직으로 신규입사자가 들어오면 교육과 훈련에 많은 품을 들여야 하고, 이로 인해 업무 하중이 발생하게 돼 환자에게 투여해야 할 역량을 발휘하기 어렵게 되는 악순환이 발생하고 있다.

보건의료산업의 연장근로는 업무의 특성 때문에 발생하기보다는 인력충원을 제대로 하지 않아 발생하는 측면이 크다.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책임지는 업무 특성상 24시간 가동돼야 하지만 병원인력을 확충하고, 교대근무제를 개선한다면 주 40시간을 준수하는 3교대 근무제는 충분히 운영 가능하다. 즉 특례 사업장에서 제외하더라도 인력충원과 교대근무제 개선으로 연장근로를 줄이고 노동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병원은 인력충원을 외면하며 특례업종이라는 이유를 내세운다. 근로시간 특례가 보건의료산업 장시간 노동과 노동강도 강화를 강화하는 도구가 되지 않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보건의료산업을 특례대상 업종에서 제외하고, 인력확충과 열악한 교대근무제 개선을 추진하는 것이 시급하다.

정재수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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