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종호 직업환경의학 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경비직, 24시간 맞교대, 60~70대, 뇌심혈관계질환의 과거력, 퇴직 후 재취업, 수면 부족…. 야간작업 특수건강진단이 시행된 이후로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노동자들을 진료실에서 보는 일이 많아졌다. 한두 가지 조건만으로도 이분들의 삶이 상당히 고단할 것임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조건이 중첩된 상태라니 그 고단함을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이러한 고단한 삶을 이루는 바탕에는 24시간 맞교대로 대표되는 초장시간 노동이 존재한다. 주 84시간에 달하는 초장시간 노동은 노동강도가 매우 낮은 ‘감시·단속업무’라는 이유로 어떠한 법적 제재도 받지 않는다. 심지어 근무 중에는 잠을 못 자도록 근로계약서를 만들고 이를 관리·감독하는 곳이 있을 정도니 열악한 근무 환경 이야기는 일일이 할 필요도 없다.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는 이러한 노동자들에게 어떤 권고를 해야 할까. 높은 뇌심혈관계질환 재발률, 고령, 장시간 및 야간노동, 수면 부족 등을 고려하면 노동시간단축과 야간작업 제한, 수면 위생과 질환관리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특히 특수건강진단 대상자라서 판정을 하게 된다면 직업병 예방과 노동자의 건강 보호·증진에 맞게 노동시간단축, 야간작업 제한이 필수적으로 입력돼야 할 것이다. 이는 노동자의 경제적 상황, 근무지, 사업주 입장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직업병 예방과 노동자의 건강 보호·증진만을 위해 내린 판단이다. 이것이 특수건강진단에서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맡은 업무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대부분 단기 계약직인 경비직 노동자에게 노동시간단축, 야간작업 제한은 퇴직 처리하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근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건강 문제를 충분히 설명해 보지만 고용이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공염불에 불과하다. 때문에 건강을 위한 의학적 판단은 대부분 보류되고 고용에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그리고 업무에 차질이 없는 선에서 “근무 중 치료, 현 작업 지속”으로 판정하고 만다. 결국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의 승인은 뇌심혈관계질환 기왕력자가 주 84시간, 초장시간 교대근무를 하도록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이러한 면죄부는 비단 야간노동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소음성 난청, 유기용제 중독, 규폐증, 만성폐쇄성 폐질환, 천식 등 특수건강진단이 다루는 많은 질환과 그와 관련된 작업 환경에 면죄부가 발급될 수 있다. 직업병 유소견자(D1) 판정, 작업 전환이 고민되는 상황에서 노동자 건강이 아닌 그의 고용안정성과 사업주 반응을 함께 고려하기 시작하는 순간 면죄부 발급 가능성이 높아지기 시작하고 병원의 수익과 사업주와의 갑을 관계를 추가로 고려하면 그 가능성은 매우 높아진다.

2006년 디메틸포름아미드(DMF) 중독 사망 사건도 결국 이러한 습관적 면죄부가 빚어낸 문제였다. 하지만 이후로 어떠한 구조적 개선이 이뤄졌는가. 특수건강진단 판정에서 노동자 건강 이외에 판단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은 모두 제거됐는가. 아니 하나라도 제거됐는가. 불행히도 여전히 특수건강진단은 노동자 건강 이외에 많은 요소들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있다.

이런 구조에서 직업환경의학 전문의가 가진 권한은 매우 협소하다. 심지어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고용마저도 보장되지 않는 상태다. 이 구조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변함이 없다. 비록 현실은 변함이 없지만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로서, 노동자의 건강을 지키는 파수꾼이자 전문가로서 모든 제약을 벗어나 심지어 근로기준법을 넘어서더라도 노동자의 건강을 위한 판정을 하고 그 판정 그대로 실행되는 날이 오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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