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노총

"생로병사 현장이다 보니 어느 곳보다 감정 노출이 극심한 곳이 병원이에요. 아마 지리산에서 수십년 도를 닦아도 감당하기 어려울 겁니다. 출근할 때는 성질 다 죽이고 '나 죽었소' 합니다."

최미영 한국노총 부위원장이 마이크를 잡자마자 속사포처럼 감정노동 최전선에 있는 간호사들의 노동현실을 쏟아 냈다. 최 부위원장은 20여년 경력의 순천향대 천안병원 간호사다. 노조위원장과 한국노총 부위원장을 겸직하고 있다.

"새벽 4시에 채혈을 하러 병실에 갔는데요. 아이를 간호하던 아기 엄마가 갑자기 사과 깎던 칼로 함께 있던 시어머니 등을 찌르고 제게도 칼을 휘두르려다 제압당한 일이 있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시어머니가 결혼을 극심히 반대했고, 결혼 후에도 '너 때문에 애가 아프다'고 며느리 구박을 계속해서 스트레스가 극심했다고 하더라고요. 간호사들은 그런 히스토리를 모른 채 환자와 가족을 만나니까 위험에 노출되는 거죠. 그 일을 겪은 뒤에는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백의의 천사? "백의의 전사들"=최 부위원장이 "간호사들을 '백의의 천사'라고 하는데, 천사가 아니라 백의의 전사"라고 하자, 플로어에서 공감의 한숨과 탄식이 터져 나왔다. 50회 산업안전보건 강조주간을 맞아 한국노총과 안전보건공단이 3일 오후 서울 강남구 코엑스 콘퍼런스룸에서 개최한 '직무 스트레스 예방을 위한 안전보건 힐링 토크콘서트'에서다.

2013년 라면 상무, 2014년 땅콩 회항과 압구정동 경비원 자살, 2015년 부천 백화점 무릎 사과, 2017년 이동통신사 고객센터 현장실습 고등학생 자살, tvN 드라마 <혼술남녀> 신입 조연출 고 이한빛 PD 자살.

키워드만으로 알 수 있을 만큼 우리 사회를 강타했던 대표적인 갑질사건과 자살사건이다. 연이은 사건으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부당한 갑질에 병들어 있는지, 노동자들의 직무 스트레스와 감정노동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가 사회적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이날 '안전보건 힐링 토크콘서트'에서는 감정노동자들이 현장에서 겪고 있는 스트레스 실태와 이들의 신체·정신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개선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최미영 부위원장과 배우 박철민씨, 류장진 안전보건공단 직업건강실장, 정혜선 한국산업간호협회장이 토크콘서트 손님으로 나왔다. 기업체 보건 관리자들과 대학원생, 병원노동자 등 150여명이 함께했다.

◇"드라마 제작현장 폭언·폭행 비일비재"=최 부위원장이 병원노동자 감정노동 실태를 증언했다면, 배우 박철민씨는 드라마·영화 촬영현장의 뒷얘기를 들려줬다. 박씨는 "영화현장을 보면 스태프들의 처우와 제작환경이 과거보다 좋아진 게 사실이지만, 드라마 현장은 1주일에 70분짜리 드라마 2편을 만들어야 하는 만큼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다"며 "스태프나 배우 모두 밤새워 일하면서 안전사고가 일어나기도 하고, 보조출연자들에 대한 폭언·폭행 등의 일도 비일비재하다"고 전했다.

촬영현장 부조리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운 현실도 털어놓았다. 박씨는 "예전에 보조출연자들에게 욕을 하는 감독에게 '왜 저분들에게 육두문자를 쓰느냐'고 흥분해서 지적한 적이 있는데, 그 이후 작품에 잘 부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문제제기 이후 불이익을 받은 셈이다. 그는 "카메라 뒤에서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이 따로 없고 모두가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며 "배우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쉽지 않겠지만, 저 또한 촬영현장 안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힘희롱방지법 통과돼야"=류장진 공단 직업건강실장은 감정노동자들의 직무 스트레스 해결을 위한 국가적 인프라 마련을 강조했다.

류 실장은 "일본에서는 50인 이상 사업장의 사업주가 매년 1회 이상 직원들의 스트레스를 체크하고 심리적 문제가 있으면 작업전환을 하거나 근로시간을 단축하는 등 '직장인 스트레스 체크 의무화' 제도가 있다"며 "우리나라도 일본 사례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상사가 부하에게 직위를 이용해 스트레스를 주는 힘희롱(power harassment)은 산재발생에 기여하는 바가 크고, 근로손실일수와도 연동이 깊다"며 "국회에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힘희롱방지법(근로기준법 개정안)이 계류돼 있는데, 법 개정 전에라도 정부가 선재적으로 고객응대업종에 매뉴얼을 만들어 배포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혜선 한국산업간호협회장은 "감정노동자들의 직무 스트레스를 사전에 체크하고 예방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고, 스트레스가 높다고 '문제 있는 사람'으로 낙인찍어서도 안 된다"며 "직원들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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