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

2015년 초 패션노조와 알바노조·청년유니온 등은 ‘청년착취대상’이라는 퍼포먼스와 함께 패션산업에 종사하는 디자이너들의 노동현실을 고발하고 ‘열정페이’ 문제를 공론화했다. 당시 문제제기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듬해 고용노동부는 ‘열정페이 가이드라인’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패션산업의 구조적 노동환경 개선을 추동하는 업종별 교섭 단계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청년유니온은 이해당사자라 할 수 있는 패션인연합회와 수차례 간담회와 논의를 진행했으나 대규모 기업체와 개인 디자이너 간 격차 등으로 표현되는 산업구조 특징, 현장 노동주체 개별화와 조직역량 부재,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대내외적 동기와 자원 부재 등의 요인으로 유의미한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패션업계뿐 아니라 2000년대 들어 각종 신흥산업에서 나타나는 노동착취 문제는 상당한 수준으로 공론화하고 있다. 게임산업이 대표적이다. 최근 논란이 된 넷마블의 과로 문제와 노동자 돌연사는 우리 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안겨 줬다. 개발자와 디자이너 등 현장 종사자들 사이에서는 소위 ‘갈아 넣는 기간’을 의미하는 업계 용어인 크런치 모드(Crunch mode)가 대중에게 회자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그러고 보니 방송산업에서도 비슷한 의미가 담겨 있는 디졸브(dissolve)라는 업계 용어를 쓴다. 디졸브는 본래 한 화면이 사라짐과 동시에 다른 화면이 점차로 나타나는 장면 전환 기법을 의미하는데, 현장에서는 하루 20시간이 넘는 노동을 수행하고 아주 잠깐 눈을 붙인 다음에 다음날 촬영현장에 투입되는 노동과정을 묘사하는 용어로 쓰인다.

2000년대 버전의 벤처붐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IT기술 기반 스타트업 생태계도 노동문제에 관한 비슷한 위험성이 내포돼 있다. 5~6명 정도 인원의 높은 일치성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초기 창업단계에서는 갈등이 드러나지 않지만, 조직의 성장단계가 20~50명 수준의 고용규모에 이르게 되면 양상이 달라진다. 개별주체의 노동특성을 반영한 근로계약서, 조직 운영원리를 제도화한 취업규칙과 노사협의회 같은 제도를 조직 발전단계에 맞춰 업데이트하지 않고, 소규모 인원이 도원결의를 나눴던 초기 창업단계의 향수에 빠져 있게 되면 많은 경우에 분쟁이 발생한다.

필자는 신흥산업의 노동문제가 드러나는 양상과 발생 원인이 대체로 유사한 경로를 밟고 있다고 생각한다. 산업 규모가 성장하는 단계에 발맞춰 구성원이 공존할 수 있는 규칙(Rule)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남게 되는 조직의 운영원리는 약육강식뿐이다. 초창기 시장을 개척했던 누군가는 날이 갈수록 신격화돼 추상적인 세계로 밀어 올려지고, 아주 촘촘한 계단으로 나열된 구성원들의 위계 속에서는 미시적인 착취와 폭력이 끊이지 않는다. 개별 행위자들의 미시적 착취가 누적돼 구조적으로 공고화될 때 신흥산업의 발전동력은 소멸돼 간다. 근대문명 이전 시기 공동체의 작동원리가 오늘날 첨단산업에 적용되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몇 달 전 국제개발 영역에서 3~5년 정도 종사한 젊은 노동자들과 노동문제를 이슈로 간담회를 진행한 적이 있다. 이분들은 국제개발 업무를 수행하는 현장에 애정을 느끼고 있지만, 신규로 진입한 젊은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결사체가 없다는 것을 고민으로 안고 있었다. 꼭 개별기업 수준의 노동조합이 아니더라도, 공통의 업종·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겪는 노동문제를 중심으로 한 느슨한 결사체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를 조직할 경험과 자원의 부재는 쉽게 풀 수 없는 난제였다.

청년유니온 위원장 (cartney1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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